여기 전투에서 진 뒤 자결하는 대신 항복하는 길을 택한 미군 3성장군이 있다. 3년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고 풀려난 이 장군은 평생토록 항복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나 미 정부는 오히려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별 넷,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왜일까.

미국 국방부는 2일(현지시간)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항복 문서 서명 74주년을 맞아 미 육군의 조너던 웨인라이트(1883∼1953) 장군을 추모하는 장문의 글을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日에 필리핀 내주고 절치부심한 美
2차 대전에서 진 일본이 1945년 9월2일 미국 등 9개 연합국에 정식 항복을 하는 자리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당연히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 그런데 연합국을 대표해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원수 바로 뒤에 비쩍 마른 두 명의 장군이 배석자처럼 차렷 자세로 서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 사람은 미 육군의 웨인라이트 장군, 다른 한 사람은 영국 육군의 아서 퍼시벌 장군이었다. 두 명 모두 얼마 전까지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던 터라 건강도 나쁘고 풍채는 더욱 볼품 없었다.
웨인라이트 장군은 1942년 일본군이 미국 자치령이던 필리핀을 공격했을 때 현지 미군의 방어 책임자였다. 당시 맥아더 원수가 필리핀 주둔 미군 및 필리핀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웨인라이트 장군의 상급자였다.
문제는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본의 아니게 전쟁에 뛰어든 미국이 아직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군의 패배, 그리고 일본군의 필리핀 점령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미국인 사이에서 ‘전쟁 영웅’으로 통하는 맥아더 원수가 일본군에 지거나 포로로 잡히기라도 하면 국민적 사기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것이 확실했다.
◆맥아더를 대신해 짊어진 고난의 짐
이에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 필리핀에 있던 맥아더 원수한테 “가족과 함께 당장 그곳에서 빠져나와 호주에 새 사령부를 차리고 일본과의 장기전 준비에 돌입하라”고 명령했다.
1942년 3월 대통령의 명을 받든 맥아더 원수가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I Shall Return)”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호주로 떠난 뒤 필리핀 주둔 미군의 최고 지휘관 자리는 웨인라이트 장군이 넘겨받았다.
미군은 식량이 떨어지고 각종 보급도 끊긴 악조건 속에서 일본군과 싸워 가까스로 2개월가량 버텼다. 수도 마닐라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진 다음에도 바타안 반도, 종국에는 코레히도르 섬까지 후퇴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곧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1942년 5월6일 웨인라이트 장군은 일본군에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그는 2차 대전 중 포로로 잡힌 미군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은 군인으로 기록됐다.
당시 포로가 된 미군은 바타안반도에서 10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수용소까지 걸어서 이동했는데 뜨거운 날씨와 부족한 음식, 여기에 일본군의 학대까지 더해져 상당수 인원이 수용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미국 역사는 이 참사를 ‘바타안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패장, 승자가 되어 돌아오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힌 직후 웨인라이트 장군은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났다. 보름이 지난 8월30일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미군이 패전국 일본 점령을 위해 도쿄에 상륙한 직후 웨인라이트 장군도 미군 일행에 합류, 옛 상관인 맥아더 원수와 감격스러운 재회를 한다.

1945년 9월2일 미국 등 연합국 대표단이 도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군함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일본 대표단의 공식 항복을 받을 때 미군 측은 일부러 웨인라이트 장군을 맥아더 원수 바로 뒤에 서 있게 했다. 웨인라이트 장군 옆에는 영국 육군의 아서 퍼시벌 장군이 서 있었다. 퍼시벌 장군 역시 1942년 영국령 싱가포르가 일본군에 함락될 때 최후까지 버티다가 항복, 포로가 된 뒤 종전과 더불어 풀려난 인물이었다. 둘을 항복 문서 서명식의 전면에 내세운 건 패전국 일본에 최대한의 모욕감을 안김과 동시에 ‘복수’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날 웨인라이트 장군은 이번엔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1945년 9월3일 그는 아직 필리핀에 남아 있던 일본군이 미군에 무조건 항복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바타안의 영웅"… 진급에 훈장까지
웨인라이트 장군은 그가 1942년 필리핀에서 항복한 일을 평생토록 부끄럽게 여기며 스스로를 ‘패배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와 육군의 대접은 전혀 달랐다. 그는 맥아더 원수, 그리고 필리핀에 있던 모든 미국인을 대신해 ‘희생’을 했을 뿐이며 필리핀에서 벌인 미군의 마지막 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영웅적이었다는 것이 미 정부와 육군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그가 미국에 돌아갔을 때 대중은 ‘바타안의 영웅(Hero of Bataan)’이라고 부르며 성대하게 환영했다.
미 정부는 종전과 동시에 웨인라이트 장군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또 군인들이 큰 영예로 여기는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이 훈장은 전투원으로서 희생적 수훈을 세운 사람에게 미 의회 이름으로 대통령이 친히 수여하는 최고 훈장이다.
이후 웨인라이트 장군은 미 육군 제4군 사령관에 임명돼 1947년 8월까지 복무하고 퇴역했다. 1953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한 그의 유해는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미 육군은 그의 희생을 기리는 뜻에서 1961년 알래스카주의 육군 기지 한 곳에 ‘웨인라이트 기지(Fort Wainwright)’란 이름을 붙였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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