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이 4년 만에 무대에 올린 ‘백조의 호수’에서 ‘박슬기’가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지난달 28일 개막 공연에서 박슬기는 수석무용수로서 고도의 연기와 기교로 오데트·오딜의 진면모를 보여줬다. 김주원에 이어 김지영까지 최근 국립발레단을 떠나며 막 내린 ‘김지영·김주원’ 투톱체제 이후 국립발레단을 누가 대표할 것인지 보여주는 무대였다. 2007년 입단 후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쌓은 내공에 힘입어 박슬기는 이날 주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가장 유명한 발레, 아름다운 발레로 손꼽히는 백조의 호수는 여주인공에게는 가혹한 도전의 무대다. 애초 2명이 나눠 맡던 오데트·오딜을 전설적인 이탈리아 발레리나가 도맡으면서 1인 2역으로 굳어졌다. 이후 오데트·오딜은 다른 주인공보다 2∼3배 많은 무용을 소화해야 하는 발레리나 세계 최정점이 됐다. 게다가 성격이 상반되는 진정한 사랑만으로 저주가 풀리는 비운의 백조 오데트와 악마의 딸로 ‘팜므파탈’ 격인 흑조 오딜을 같은 무대에서 연기하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2008년 호두까기 인형에서 ‘마리’로 주역 데뷔한 박슬기는 2015년 공연 때도 오데트·오딜을 맡은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무대와는 그 무게가 다르다. 당시 공연에선 ‘특히 오데트·오딜 연기가 일품’이란 평가의 김지영이 맡았던 첫 무대를 이번엔 박슬기가 책임져야 했다.
자신을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히 실력이 나아진 것 같다”며 노력파로 평가했던 박슬기는 1막에서 한없이 서정적이고 우아한 오데트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유난히 가녀리고 긴 팔로 백조의 날갯짓을 완벽히 구현했다. 시선을 앞에 둔 채 두 팔을 뒤로 젖힌 장면에선 달빛 아래 호숫가에 떠 있는 백조 그 자체였다. 백조의 호수에서만 볼 수 있는 발레리나의 특별한 팔 움직임이 이러한 심상(心象)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임을 실감케 했다.
박슬기가 앞으로 전성시대를 만들어갈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준 건 2막이었다. 남다른 재능의 톱 발레리나라도 오데트와 오딜을 모두 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통상 백조의 호수 주역을 ‘백조파’, ‘흑조파’로 나누곤 한다. 그런데 박슬기는 2막에서도 분위기를 일신하며 물오른 연기와 기교로 오딜을 연기해 갈채를 받았다. 오데트와 오딜,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지였다.
2014년 공연에서 악마 ‘로트바르트’로서 호연이 끝난 후 강수진 예술감독이 그 자리에서 수석무용수로 두 단계 승급시킨 이재우는 이번 공연에서 로트바르트 역은 물론 왕자 지크프리트 역도 맡았다. 균형 잡힌 신장 195㎝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만의 존재감은 ‘양날의 칼’이다. 개막 공연에서 선보인 로트바르트 연기는 딱 맞은 옷을 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지크프리트로 분한 허서명과 추는 섀도 댄스 호흡이 아쉬웠으나 자신의 딸 오딜과 왕자를 맺어주는 흉계를 성공시킨 후 그가 추는 선 굵은 독무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는 무대를 꽉 채웠다.
이재우는 개막 공연 전날 언론 시연에선 지크프리트로 무대에 섰는데 특유의 존재감이 무대 균형을 흔들 정도였다. 다행히 신장 170㎝로 역시 최장신 그룹에 속하는 정은영이 새로운 오데트로 발탁돼 이재우와 균형을 맞췄다. 정은영은 모두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숨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흑조가 왕자를 유혹하며 추는 32연속 회전을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차세대 발레스타임을 입증했다.
백조의 호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군무 역시 국립발레단이 쌓은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몽환적인 푸른 달빛 아래 24명의 발레리나가 한 치 오차 없이 보여주는 춤은 ‘피안(彼岸)의 세계’를 무대에 만들었다. 2막을 여는 궁정 무도회 역시 각 공주의 수준 높은 춤에서 국립발레단 실력이 잘 드러났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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