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예쁜데 이걸 어떻게 지우냐.”
성폭력 피해자 A씨가 자신의 전신 노출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 로타(41·본명 최원석)에게 사진을 지워달라고 요청하자 로타가 보였다는 반응이다. 유명 사진작가 앞에 무명 모델은 한없이 작고 무력했다. 2013년 6월, 사진 촬영 중 휴식시간 등에 로타는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신체 접촉을 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지만, 피해자는 작가의 영향력을 의식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로부터 줄곧 ‘반성이나 진지한 사과의 기미가 없다’는 평가를 들었던 최씨는 지난 12일 항소심에서 강제 추행 혐의로 원심과 같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피해자는 예상하지 못한 추행 상황을 맞닥뜨렸다. 피고인은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며 “죄질이 불량하다”고 판시했다.
유튜버 양예원씨의 사진을 유출하고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 최모(45)씨도 지난 8일 상고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이 확정됐다. 비공개 촬영회 모집책인 최씨는 2015년 7월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양씨의 신체가 드러난 사진을 촬영하고 2017년 6월쯤 사진 115장을 지인에게 제공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펴낸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사진계의 성폭력은 주로 수직적 구조에서 일어났다. 2016년 사진 잡지 VOSTOK이 사진계 내 성폭력 피해자라고 응답한 385명(여성 286명, 남성 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피해자 절반 이상이 20대였고, 신분은 학생, 사진작가, 모델 순으로 많았다. 이들이 지목한 가해자는 85.7%가 남성이었으며 교수, 강사, 상사나 선배 등이 과반이었다.

김현미 사회학자는 「대중문화가 ‘낭만화’하고 있는 성폭력과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2002)」에서 문화예술계 내에서 성폭력이 용인되는 이유를 분석했다. 그는 “저항성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중문화의 현장에서 성폭력은 곧잘 ‘성해방’의 표현으로 번역된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들이 “예술가는 색기가 있어야 한다”, “예술가가 되려면 성적으로 탈선해봐야 한다”며 자신의 성폭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의 제대로 된 판단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했을 때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반면 피해자들은 자신의 오랜 꿈을 포기하거나 공동체 안에서 배척될 수 있다는 부담이 크다고 한다.
실제 성폭력을 겪은 후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한 비율은 매우 낮았다. 385명 중 80.9%가 이후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 ‘소문과 평판에 대한 두려움’, ‘대처 방법을 잘 몰라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순이었다.
그렇기에 최근 일련의 판결들이 ‘미투(Me Too)’ 운동으로 촉발된 ‘사진계 미투’의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회적 공분이 컸던 사건 가해자들에게 연이어 실형이 선고됐다. 사진계에 공공연히 존재했던 ‘권력형 성폭력’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다.
양예원씨가 대중 앞에 나섰을 때 사진계의 추악한 뒷모습을 언론에 전했던 박재현 사진작가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여성들의 권익이나 성 문제에 대해 올해 아주 큰 발전과 행보가 있었다고 본다. 아무 짓 안 한 듯 사는 파렴치한 작가들은 앞으로 매우 긴장하고 살아야 할 것”이라며 “사진계에서의 미투는 상시 제대로 아주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 모두가 그녀를(그를) 감싸고 보호하고 행복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반드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식의 변화로 촬영 현장에서 작가들이 ‘조심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 사진작가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로타 작가 같은 그런 류의 18세 등 어린 여성의 ‘세미누드’ 사진을 찍는 분들은 노출 사진을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 찍다 보니 피해자가 말을 하지 않으면 성폭력 사실을 알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그런데 미투 운동 이후 어린 친구들도 인식이 바뀌어 한두 번 그러다 보면 업계가 좁아 금방 소문이 난다”고 달라진 기류를 전했다.
그는 “남자(작가)들 입장에서 모델을 대할 때 훨씬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떤 행동을 해도 고소당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성추행 등으로 고소를 당한 작가도 몇명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어 “꼭 사진계뿐 아니라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니 당연한 부분 같다. 우리도 작업 중 모델의 포즈나 몸매 등을 평가해줘야 하는 부분에서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며 “인식도 행동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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