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반도 정세가 국운이 위태로웠던 100여년 전 조선 말기를 연상케 한다. 1871년 미국이 일으킨 신미양요를 시작으로 운요호 사건(1875년·일본), 임오군란(1882년·중국), 갑신정변(1884년·일본), 아관파천(1896년·러시아)이 이어졌다. 당시 등장했던 국가도 요즘 한반도 정세를 위협하는 세력과 비슷하다. 조선을 돕기 위해 왔던 외세가 되레 적으로 돌변하거나 억지스러운 논리로 공격한 상황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출규제로 경제보복에 나선 일본과의 외교분쟁이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백서,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가 꼬리를 물면서 사방으로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 한반도 정세에 적극 개입하던 미국이 예전과 달리 ‘방관자적’ 자세로 일관하면서 한국은 외교·안보에서 ‘5중고’를 겪는 위기의 형국이다.
◆북한에 올인한 외교라인 자충수

북한은 신형 잠수함 공개에 이어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시험 발사하며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도발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북·미가 합의한 비핵화 실무협상 재개 시한인 3주를 넘기도록 대화 재개는커녕 오히려 압박 카드를 꺼내 든 격이다. 북한이 다음 달로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까지 앞으로 점차 수위를 높이며 도발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 더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이는 ‘북한 눈치보기’ 소리를 듣는 문재인정부의 저자세가 자초한 것이라는 전문가들 의견이 적잖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이날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역동성이 부각된 현시점에서 우리 정부의 가장 큰 실수는 북한에 올인을 한 것”이라며 “북한 문제를 해결하면 동북아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접근한 것이 어려움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새 국제질서… 자국 우선주의 팽배

사드 갈등 이후 겨우 봉합된 줄 알았던 중국과의 관계도 다시 삐걱거리는 조짐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연합훈련을 하며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한 데 이어 전날에는 ‘신시대 중국국방’ 백서를 통해 한국의 사드 배치가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엄중하게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면 지난달 일본 오사카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선 사드 문제를 꺼내 껄끄러운 관계를 구축했다.
한반도에서 역할이 거의 없어진 줄 알았던 러시아는 이번 영공 침범을 계기로 다시 한반도에 입지를 키우며 복병으로 등장했다. 러시아는 올해 북·러 정상회담을 한반도에서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했고, 이때 잊힌 이야기인 줄로 알았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꾸려졌던 ‘6자회담’의 필요성을 다시 언급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지역 패권구도에서 서로 협력을 하고 있다”며 “그동안 극동지역이 조금 잊힌 지역이었는데 러시아의 ‘룩 이스트’ 전략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이를 촉발시킨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전통적 동맹의 달라진 청구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국제질서가 자국의 이해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중·러는 이 틈새를 정확히 노린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라인은 중·러의 도발을 애써 축소해석하며 로키로 대응하려 했지만 러시아의 적반하장 격인 대응에 국내외 여론만 나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공 침범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소집되지 않았고 국군 최고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데 대한 부정적 여론이 거세다.
박원곤 교수는 “주권국가의 원칙을 무시한 러시아에 대해서는 강력한 성명을 내고 필요하다면 대응훈련이나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목소리를 내도록 압박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근 외교갈등의 시발점이었던 일본은 수출규제에 이어 이번에는 중·러의 영공 도발을 틈타 독도 문제까지 전선을 확대하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미국을 활용해 일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전 방한한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우리의 손을 들어주기는커녕 ‘방위비 분담금’ 문제와 ‘호르무즈해협’ 참전 같은 ‘청구서’만 안겨주고 떠났다. 특히 중·러의 도발에 대해서도 미국 국무부는 “한·일 두 나라의 대응을 강하게 지지한다”고 밝히는 데 그쳤다. 강한 규탄 성명을 내고 한국에 힘을 실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미국이 달라진 모습을 보인 것이다.
◆100년 전과는 달라진 한국… 대응책 시급
정부는 그동안 ‘중재자’, ‘촉진자’ 역할을 자처하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이번 정권 최대의 치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북한은 한국 국민이 승선한 러시아 선박을 나포해 러시아에는 영사접견을 보장하면서도 우리 측에는 신병에 관한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고 애를 태우고 있다. 또 자신들이 요구했던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쌀 5만 지원을 거부하겠다고 밝히며 정부 당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한국이 잘못해서 우리가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미·중 분쟁이라는 전략적 구도가 한반도에 투사되면서 우리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됐다”며 “100여년 전 조선 말기 상황과 지정학적 구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국력이나 국가의 위상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과거에는 대응 수단 자체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대응 방식이나 여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靑 NSC 상임위 소집… “대화·압박기조 계속”

청와대는 25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해 북한 강원도 원산 일대에서 쏘아 올린 신형 단거리 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2발을 분석한 결과 ‘새로운 종류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분석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올 들어 발사한 두 번째 마사일을 단거리 미사일이라며 탄도미사일 가능성은 부인했었다. 이번 발표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결정한 셈이다.
NSC 상임위는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이러한 북한의 행위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완화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이번 NSC 회의는 평소보다 20여분 더 진행됐으며,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강한 우려’라는 문구도 이례적인 표현이다.

이에 따라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를 주장하는 문재인정부의 목소리는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의 기준으로 ‘탄도미사일’임을 강조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9일 취임 2주년 특별 대담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는 북한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겨냥한 것”이라며 “그 이전에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에는 문제 삼은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반대로 탄도미사일이 확인될 경우에는 북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비등해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대화’와 ‘압박’이라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더라도 최종 종착지인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는 압박을 하면서도 꾸준히 대화를 해 평화로 유도해야 하는 ‘투트랙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규탄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한발 더 나아가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에 방점을 둔 외교안보 정책 전환을 요구하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북한의 도발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안보를 정쟁의 소재로 삼아선 안 된다며 야당을 견제하고 나섰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북·미 회동이 사실상 종전선언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미사일 발사로) 얼마나 안이한 인식이었는지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교안보 정책의 틀 자체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미·일 공조를 복원하는 것은 물론 9·19 군사합의를 즉각 무효화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두고 “한반도 군사 긴장을 고조시키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강력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며 “야당도 정쟁 소재로 활용하려는 무책임한 시도를 중단하고 초당적 안보협력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독도 영공침범 증거자료’ 軍, 러 측에 내밀었지만…

우리 군 당국이 최근 발생한 러시아 군용기의 독도 영공침범과 관련한 증거자료를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25일 오전 서울 국방부 청사에서 러시아 군용기의 독도 영공침범과 관련해 열린 한·러 국장급 실무협의에서다. 양국 실무협의에는 국방부 이원익 국제정책관과 주한 러시아 무관부 무관대리 니콜라이 마르첸코 공군대령 등이 참석했다. 협의는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한 시간 정도 진행됐다.
국방부가 제시한 자료는 중앙방공통제소(MCRC)에서 포착한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 A-50의 영공 침입 당시 좌표, 대응을 위해 출격한 KF-16과 F-15K 항공기의 영상저장장치(DVR) 기록, KF-16 전투기에서 발사한 플레어 사진, 전투기 조종사의 경고 사격 음성기록 등으로 전해졌다. 우리 측은 증거자료 제시와 함께 관련 설명도 했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러시아 측은 영공침범 여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 없이 “러시아 국방부에 이 자료를 보내 확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증거를 인정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군 관계자는 “러시아가 타국 영공을 침범한 사례는 많지만, 이를 인정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는 거로 안다”며 “이번의 경우에도 ‘자료가 잘못됐다’, ‘한국군의 기기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발뺌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자국 군용기의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사실상 인정하면서 유감을 표명했다는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의 발표를 재차 부인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24일 트위터 공식 계정에 글을 올려 “그러한 주장들(윤 수석의 발언을 인용한 언론보도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러시아 측은 러시아 공중우주군 군용기의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시아에 대해 제기된 혐의와 관련한 러시아 측의 공식 입장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사건 정황을 면밀히 검토한 뒤에 정립되고 한국 측에 전달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크 에스퍼 미국 신임 국방장관은 이날 미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가 기억하는 한 러시아 군용기가 남쪽으로 비행한 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며, 그들이 ‘한국 영공’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새로운 것”이라며 “한국은 일종의 억지를 위해 분명히 대응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당시 중국 폭격기와 함께 한 훈련 영상 일부를 공개했지만독도 영공을 침범해 문제가 됐던 A-50의 모습은 빠졌다.
조병욱·김달중·이창훈·이정우·유태영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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