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0일 판문점 ‘깜짝 만남’은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회동 하루 전 ‘번개 만남’을 제안하자 김 위원장이 이에 적극 호응하면서 성사된 것이다. 두 정상 만남의 가교 역할은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북한 측 실무진이 담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건 대표 - 北 실무진 늦은 밤 접촉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첫날인 29일 저녁 청와대 만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보좌관 등 실무진이 만찬장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갑작스러운 북·미 판문점 만남을 위한 의전·경호·통신·생중계 등 협의에 분주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날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비건 대표는 전날 밤 판문점에서 북측과 극비 회동해 양국 정상의 만남을 조율했다. 미국은 유엔사·북한군 간의 직통전화로 ‘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을 위한 실무접촉을 제안했고, 북측이 이에 즉각 호응하면서 준비가 본격화됐다.
미국은 전날 밤늦게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 북측에 자신들이 구상한 시나리오를 설명하고,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협의를 했다. 비건 대표와 만난 북측 인사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비건 대표는 이 자리에서 두 정상 만남을 공식 제안하는 문서를 건넸다.
미국이 북측으로부터 ‘북·미 정상 만남’에 대한 공식 답변을 받은 건 이날 새벽인 것으로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회견에서 “(DMZ 회동 제안에) 김 위원장에게서도 바로 반응이 왔다”고 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

◆판문점 만남, 美 참모진도 허 찔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기간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 3자 회동이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일부 외신과 한·미 양국 외교가에서 흘러나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시간)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 김 위원장과 만날 계획이 없다고 부인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 있는 동안 김 위원장이 이 글을 본다면, 나는 DMZ(비무장지대)에서 그를 만나 손을 잡고 인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날 오전 7시51분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글이 일으킨 파장은 대단히 컸다.

외신들은 그의 ‘깜짝 트윗’을 인용해 북·미 정상이 사상 최초로 한반도에서 만날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짚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DMZ 회동 제안에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도 허를 찔렸다고 보도했다. CNN도 “미 정부 주요 관리들이 트럼프의 트윗을 보고 회동 제안 사실을 알았다”며 이번 제안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한의 반응은 오후 1시6분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 형식으로 나왔다. 최 부상이 “양국 관계 진전에서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화답하면서 두 정상의 역사적 만남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 정치전문지 더 힐은 이번 만남이 미리 기획된 이벤트일 가능성을 29일 제기했다. 지난 24일 트럼프 대통령 인터뷰에서 기자가 ‘김 위원장이 만나자고 하면 만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었다는 설명이다. 더 힐은 당시에는 백악관 요청으로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면서 24일 트럼프 대통령 머릿속에 이미 북·미 정상 간 DMZ 만남 구상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29일 방한 직전에도 이번 만남에 대해 “오늘 아침에 생각한 것”이라며 즉흥 제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노이 이후 실추된 위상·리더십 회복 포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깜짝 제안을 수용하기까지는 복합적인 계산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실추된 정치적 위상과 리더십 회복을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파격을 주저하지 않는 김 위원장 특유의 결단력과 승부사적 기질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분석이다.
김 위원장은 4개월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빈손으로 돌아선 이후 북한 내부를 다잡기에 노력했다. 미국의 최고 지도자와 동등하게 만나 상봉하는 모습을 통해 북한 내부에서 실추된 김 위원장의 권위와 위상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은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하노이 노딜 이후 대화 재개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제안을 하면서 대화 재개의 확실한 모멘텀이 확보됐다”며 “북한 내부적으로 북·미 협상에 대한 회의감이 제기되는 것을 불식시키고 통치상의 위상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제안 수용에는 그동안 강조해온 북·미 정상 간의 친분과 신뢰를 과시하고 양국의 대화 재개를 기정사실로 한다는 의미도 담겼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각하와 나 사이 존재하는 그런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아마 하루 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훌륭한 관계로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좋은 일들을 계속 만들면서 맞아들이는 난관과 장애를 견인하고 극복하는 그런 신비로운 힘으로 될 거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러시아·중국과 잇달아 정상회담을 열었지만 뚜렷한 경제적 성과를 끌어내지 못한 점도 김 위원장이 북·미 대화에 다시 나서야 했던 현실적인 이유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경제 성장을 추진하며 경제난 해소에 집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가운데 유엔을 중심으로 한 대북 제재를 버티기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과의 대화 재개 명분을 기다리던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의 인도적 지원이나 미국 내 일부 대화의 목소리 만으로는 대화에 나설 명분이 부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정확히 포착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상신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 입장에서 미국과 한국 정부의 제안 시기가 절묘했다”며 “북한이 이례적으로 빠른 의사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북한도 대화 재개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교착 국면을 끝내고 새로운 대화 무드로 전환한다는 것을 국내외에 알리는 이벤트적 의미도 보인다.

◆‘퍼스트패밀리’ 김여정·이방카 한자리에
남·북·미 판문점 ‘깜짝 만남’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수행한 측근들이 과거와 다른 위상과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관심이 집중됐던 북·미 양국의 ‘퍼스트 패밀리’ 사이의 회동도 이번에 처음 이뤄졌다.
30일 김 위원장의 수행원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인물은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다. 이들은 이번 만남의 실무적인 의제와 진행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제안에 대한 답변도 최 제1부상이 맡았다. 하노이 회담 때에도 김 위원장의 ‘입’을 자처하며 남한 취재진과 만나 직접 김 위원장의 의중을 전달하는 등 협상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월 외무성 제1부상으로는 이례적으로 국무위원에도 올랐다. 리 외무상은 북한 내 단연 최고의 ‘미국통’으로 통한다.
앞서 하노이 회담까지는 김영철 노동당 당시 통일전선부장이 회담을 이끌었지만 이후 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재편된 새로운 협상팀은 외무성 중심으로 꾸려졌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북·미 관계를 외교 틀에서 풀어나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동안 김 위원장을 그림자 수행해 온 김여정 제1부부장은 한때 근신설이 나왔지만 이날 모습을 드러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다만 과거 의전이나 수행을 직접 담당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멀찍이 떨어져 김 위원장을 보좌했다. 이 때문에 김 제1부부장의 위상이 실무자급에서 지도자급으로 격상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과거 김 제1부부장이 맡았던 직접 수행은 현송월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날 북·미 정상의 만남에 앞서 가장 먼저 언론에 포착된 것은 김 위원장의 의전을 담당하는 김창선 국무위원회 부장이었다. 그는 북한 취재진에게도 지시를 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또 양 정상의 ‘퍼스트 패밀리’ 간 대면도 성사됐다. 양국 정상의 신임을 받는 이들은 서로 공통점도 많아 만남이 이뤄진다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많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선임보좌관과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이 각각 양 정상을 수행했다. 언론 카메라에 이방카와 김여정의 직접 대화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지만 양 정상이 1시간 가까이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인사를 나눴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번 회동을 계기로 향후 북·미 대화 국면에서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유태영·조병욱 기자 ku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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