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국어가 완성된 후에 영어를 시작하는 건 위험해요. 4∼5세면 한국말도 잘하는데 영어는 그 수준보다 낮은 걸 배우면 애가 지루해하죠.”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세텍에서 열린 한 유아교육 박람회에서 영어교육업체 상담원이 설명을 들으러 온 참가자에게 ‘조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상담원은 “1세용 상품에 1∼6세 수준의 영어를 다 넣었다”며 “하루 3시간씩 2년간 2000시간의 영어입력이 있어야 모국어처럼 말할 수 있다”며 제품을 권유했다.
이처럼 영유아 교육 업체들이 아이들 교육에 민감한 부모들의 심리를 이용해 과도한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상품을 판매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19일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이 해당 영유아 교육 박람회에 참가해 학습지와 영어교재 교구 등을 중심으로 영유아 사교육 관련 상품을 조사한 결과 △최소 1.5년 이상의 선행학습 상품 판매 △‘결정적 시기’ 가설을 인용해 조기교육에 대한 양육자의 불안감 조성 △어린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는 스마트 기기 활용한 프로그램 제공 등의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학습지업체들은 ‘놀이를 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구호를 앞세워 영유아 발달 특성이 반영되지 않거나 적절한 발달 수준을 뛰어넘는 선행학습 상품이 판매하고 있었다. 한 업체는 ‘유아과정’에 ‘120이상의 수 계열 정착, 3의 덧셈까지 학습한다’는 학습목표가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현재 교육과정에서 초등학교 2학년 1학기에 이르러야 배우기 시작하는 내용이다. 유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만 5세 아이를 대상으로 가르치더라도 최소 1년반 이상의 선행학습이 이뤄지는 상황이다.
또 학습지 업체들은 ‘또래들보다 앞서서 학습할 수 있다’며 부모들의 경쟁 및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학습지 업체들은 학습지 시작 연령으로 ‘태교부터’나 ‘만 1세부터’를 제시하며 돌 전후 영아 뿐만아니라 태교용 상품까지 출시해 ‘빨리 시작할 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가 마련한 어린이집 특별활동 운영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24개월 미만 영아에게는 특별활동을 금지하고 있지만 학습지 시장은 예외라는 것이 사걱세의 설명이다.
학교 교육과 학습지 효과를 비교하는 도표를 만들어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연계를 강조해 영유아 단계부터 선행학습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학습에 흥미를 잃을 것처럼 불안감을 조장하기도 했다. 한 업체에서는 초등학교 과과서를 보여주며 “해당 당원은 신문을 만들라고 하고 기사를 쓰라고 한다. 근데 쓸 수 없는게 현실이다”라며 “최소한 이 학습지에는 다 녹아있어요. 이게 초등대비에요”라고 설명했다.
영어교육 업체들도 대부분 각 상품의 권장 연령보다 한참 앞서 시작할 것을 부모들에게 권유했다. 또 다른 영어 교육 업체도 “(우리제품으로 공부하면) 3∼4세 무렵이면 미국 6세 아이 수준의 영어를 알아듣고 5∼6세가 되면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다”며 “나중에 영어로 너무 말을 잘해서 7세 과정까지 마치면 중학교에서 배우는 교육과정까지 마치게 되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뇌의 80%가 생후 2년 안에 형성된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을 내세우며 양육자의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밖에 스마트펜, 태블릿 PC 등 스마트기기를 활용한 프로그램 비중이 높아 아동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대부분의 영유아 학습지나 영어업체들은 워크북과함께 태플릿 PC와 스마트펜이 패키지로 구성했다. 태블릿 PC나 워크북을 스마트펜으로 누르면 학습지속의 내용을 동영상으로 보거나, 애니메이션과 노래 율동 등을 따라할 수 있는 형식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어린 나이에 디지털 기기에 과도하게 노출시키는 것이 되레 뇌 발달을 막을 수 있다고 봤다. 국내 대한신경정신의학회·한국중독정신의학회·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는 지난 2015년 ‘스마트 디지털 미디어 이용에 대한 권고안’에서 “유아기에는 최대한 늦은 나이에 스마트 기기 이용을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제시했다. 또 미국소아과학회(APP)는 만2세 미만의 시기에는 가급적 스마트 미디어에 노출시키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사걱세 관계자는 “유아교육 박람회를 통해 많은 업체들이 영유아를 둔 부모들에게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는 등의 얘기로 불안감을 자극해 상품을 판매하는 것을 확인했다”며 “박람회를 찾는 부모들은 단순히 물건 구매 뿐만 아니라 올바른 육아 정보를 알기위해 오는 것인 만큼 부적절한 마케팅은 지양해야한다”고 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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