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생들과 함께 일본 영화 두 편을 연이어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본 것은 우리에게 ‘어느 가족’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90세와 87세 노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 영화 ‘인생 후르츠’였다.
‘어느 가족’의 원래 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란 일본어로 좀도둑을 뜻한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를 사로잡은 질문은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일까?”였다. 좀도둑질을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영화 속 가족은 누구도 혈연으로 얽혀 있진 않았지만, ‘진짜’ 가족보다 더욱 끈끈한 정을 나누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진짜’ 가족은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자식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정신적 학대를 서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만비키 가족’의 안정적 수입원은 할아버지의 사망 후 할머니가 수령하는 미망인 연금이다. 영화가 막바지를 향해 갈 즈음이면,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숨긴 채 할머니를 대신해서 연금을 수령하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 일본에서는 이와 동일한 일종의 연금사기사건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면서 사회문제화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으로 구성되는 초고령사회인 일본에서는 연금사기 이외에도 예상치 못했던 사회현상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실례로 두 가지가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다 한다. 하나는 헌체(獻體)라 해서 사후 자신의 시신을 해부용으로 제공하는 고령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와 비교해볼 때 누구의 손도 잡지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고령자가 증가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1970년대만 해도 헌체 등록자 수가 약 1만 명에 불과했으나, 40여년이 지난 오늘날은 희망자가 급증해 24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덕분에 헌체등록을 제한하거나 추첨으로 헌체 여부를 결정하는 의대도 나타나는 등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년 싱글 남성의 해외 이주도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자신의 연금이나 저축만으로는 일본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꿈도 꿀 수 없는 이들이 마지막 기회로 생활비가 적게 드는 필리핀이나 태국 등지로 떠난다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현지에서 안락한 결혼생활을 누리기도 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기도 한다. 일본과 개발도상국 간의 경제격차를 이용해 노후의 안락함을 도모하는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냐 여부를 두고 전문가의 우려가 이어지고 있다. 연금사기나 헌체, 개발도상국으로 이주하는 노인 등이야말로 고령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하지만 고령사회라 해서 어두운 모습 일색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 후르츠’에는 은퇴 후 노부부가 자신의 삶을 성실히 일구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젊은 시절 건축가였던 주인공 할아버지의 철학은 확고하다. 우리가 사는 집이든 우리네 인생이든 자연과 닮은 채로 친밀하게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부부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다. 아침 점심 저녁 식탁에는 직접 수확한 싱싱한 재료가 올라오고, 냉장고엔 일년 내 농사지은 것으로 손수 만든 장아찌가 가득하다. 가을이면 밭에서 캐낸 각종 채소와 과일을 친지 및 이웃에게 나누어 보내고, 봄이면 겨우내 모아두었던 낙엽을 거름이 되라고 다시 땅으로 돌려보낸다. 빼어난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 할아버지는 틈틈이 소박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을 곁들인 손편지를 써서 친지에게 보내는 것이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다. 노부부의 은퇴 후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할머니의 요리 솜씨는 화면 속에서도 빛이 나고, 할아버지를 향한 애정 어린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마저 따스하게 해준다. 부부 나이를 합산해 177세가 될 때까지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아니고서는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정(情)의 깊은 맛이라니.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전후 복구기 일본에서 뉴타운 건설이 붐을 이루던 때, 녹지를 살리며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설계도를 제안했건만 채택되지 않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영화 말미에는 노인을 위한 요양원 시설을 짓는 곳에서 할아버지의 멋진 설계도를 채택하는 감동적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90세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침 제초제를 뿌린 후 잠이 들었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먼저 가 계시면 곧 따라가겠노라”며 “그때까지 평안히 계시라”는 할머니의 독백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인생 후르츠’란 제목이 상징하는 바 그대로 인생의 결실을 맺어가는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도 고령사회의 단면임이 분명하다. 이젠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여유를 갖고 인생을 관조하며 평생을 함께해온 파트너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는 삶은 그 자체로 소박하면서도 진지한 예술인 듯하다.
2018년 이미 고령사회를 지나온 우리에게도 어둡고 우울한 단면과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공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긴 하지만 앞서 고령사회를 지나간 서구나 일본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국가가 준비할 것과 개인이 준비할 것을 꼼꼼히 챙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함인희 이화여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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