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기 맞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시인 88인이 쓴 ‘어느 푸른저녁’ 출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다가오는 7일은 기형도(1960~1989·사진) 30주기다. 요절 후 남긴 단 한 권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지난달 86쇄 끝에 30만부를 돌파했다. 한 권의 시집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이토록 오래 세대를 이어가며 받고 있는 시인은 드물다. 30주기를 맞아 그가 호소하듯 써내려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를 표제로 삼은 기형도 시전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이 표제는 시인이 생전에 첫 시집 제목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와 함께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첫 시집에 실린 시들과 미발표 시 97편을 모으고 ‘거리의 상상력’을 주제로 목차를 새롭게 구성했다. 평론가 이광호는 “‘거리’의 문맥을 지우고도 기형도를 읽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면서 “기형도의 시 앞에서 다만 그 고통을 나누어 사랑할 뿐, 기형도 시의 비밀은 세대를 이어가며 오히려 풍부해진다”고 발문에 적었다.
‘입 속의 검은 잎’ 발간 30주년을 기념해 2000년대 이후 등단한 강성은 안현미 유희경 장이지 최하연 하재연 등 88인이 쓴 88편을 모은 헌정시집 ‘어느 푸른 저녁’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진은영은 “미안하지만 지하철이 들어오고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천천히 시간의 사다리가 넘어가고/ 나의 종이, 깊은 눈 속에서 깨어났네”라는 ‘지하철 정거장에서의 충고’로 기형도의 시를 변주했다. 신용목은 “날마다 내 안에서 뛰쳐나가/ 아득히 사라지는 아이를 보며 나는 영원이라는 말을 상실 속에 가두어버렸다”고 ‘어느 푸른 저녁’의 시인에게 썼다. 강성은은 “외투를 잃어버린 남자는/ 외투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외투 없이/ 겨울에 갇혔다”고 ‘겨울에 갇힌 한 남자에 대하여’ 사유한다. 이들은 “기형도 시인에게 바친다는 의미보다는 시인의 이름과 더불어 함께 쓴다는 취지에 가깝고, 여기는 애도의 자리가 아니라 기형도의 이름으로 연결된 찬란한 우정의 공간”이라고 표방한다.
기형도의 시 ‘전문가’(專門家)를 모티프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김유가 그리고 제작한 32쪽짜리 작은 그림책 ‘전문가 Ein Experte’(문학과지성사)도 출간됐다. 학술심포지엄 ‘신화에서 역사로 - 기형도 시의 새로운 읽기’는 7일 오후 2시 연세대에서 열린다. 이날 저녁 7시부터 홍대 인근 ‘다리 소극장’에서 낭독의 밤 ‘어느 푸른 저녁’이 펼쳐질 예정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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