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고 한다. 그런데 두려움의 벽 속에 갇힌 사랑이 많은 걸 보면 진정한 사랑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스카이 캐슬, 보았는지. 거기 ‘캐슬’에 살면서 오십이 돼가도록 허물을 벗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잘나가는 의사 강준상이 나온다. ‘어머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학력고사 전국 1등까지 했고, 어머니가 의대에 가라고 해서 의사 됐고, 어머니가 병원장 되라고 해서 그거 해보려 기를 쓰다’ 운명의 뒤통수를 맞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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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
그 엄마는 도대체 무슨 힘으로 평생 아들을 조정하고 며느리 위에 군림할까. 돈의 힘이다. 정확히는 돈의 뒤에 숨어 돈을 권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춘기 맞은 딸을 둘이나 키우고 있는 며느리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도 꼿꼿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어머니라고 찾아가는 며느리는 착한 며느리인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며느리이다.
S대 의대를 보내줄 코디에게 줄 수십억원의 돈이 필요했던 며느리는 딸을 S대 의대에 합격시켜 당당하게 며느리로 인정받고 싶다며 그 돈을 해 달라고 시어머니에게 무릎을 꿇는다.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시어머니가 무엇을 원하는지 똑똑히 알아서 자기의 허영심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 시어머니의 그 며느리이다. 그런데 아는지. 할머니로부터 수십억원을 지원받은 손녀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 할머니라는 것을. 허영심이 하는 일이 그렇다.
허영심은 일종의 두려움이다. 시어머니 윤여사를 보자. 남편 의사, 아들 의사인 것이 평생의 자랑인 그녀는 ‘3대째 S대 의대를 나온 의사’를 만든다는 말에 평소 천박하다고 경멸해온 며느리에게 그날로 수십억을 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여인이다.
‘3대째 의사 가문’이라는 망상으로 인해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여인은 안타깝지도 않다. 병이기 때문이다. 끝내는 손녀에게 S대 의대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할머니가 가면 될 거 아니냐는 직격탄을 맞은 그녀의 병적인 인생은 치유될 수 있을까. 그녀는 아마 남편 빼고 자식 빼고 난 후의 자기의 모습을 보기나 한 걸까.
허영심 뒤에 숨어있는 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허영심 덩어리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윤여사가 파국을 맞은 것은 그가 집착해서 결코 놓아주는 일이 없었던 잘난 아들에 의해서이다. “어머님이 병원장 되라고 해서 그리 해보려 기를 쓰다 내 새끼인 줄도 모르고 혜나를 죽였잖아요. 지 새끼인 줄 모르고 출세에 눈이 멀어 낼 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는 놈을 만들어 놨잖아요, 어머니가.”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재물로 바치고 겨우 시작하는 아들의 홀로서기는 평생 ‘잘난 아들’에 집착해온 엄마의 파국이다. 놓지 못하면 그렇게 빼앗기게 돼 있는, 그것인 인생이다.
학벌 좋고 배경 좋은 사람들이 사는 곳, 그 캐슬은 거대한 학력 콤플렉스가 중요한 동력인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오십이 되고서도 학벌이 중요한 이상한 사회 말이다. 오죽하면 외국 언론이 우리 사회를 ‘한 방에 결정되는 사회’(The one-shot society)라고 했겠는가. 대학 졸업장이 평생의 힘이거나 짐인 사회 말이다.
명문대학을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 고군분투를 통해 돈을 갖고 권력을 갖고 든든한 직업을 갖고 잘난 아이들을 갖고 명예를 갖고 건강을 갖고 그렇게 가진 사람일수록 그것을 놓기는 힘들다. 그것의 힘이 그의 에고(ego)를 강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에고는 두려움의 집에 살고 있다.
에고는 ‘참 나’가 아니다. ‘참 나’는 에고 너머에 있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그 참 나를 ‘자기’라고 했다. 산다는 것은 그 자기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 실망을 이기고, 노여움을 삼키고, 질투를 극복하고 불안을 넘어서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나’의 아집을 녹여야 하는 걸까.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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