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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가 '영양실조'로 세상 떠난 사연

입력 : 2018-12-03 17:40:46 수정 : 2018-12-03 17: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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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 최영숙(왼쪽 사진)이 서대문 밖 거리에서 콩나물을 팔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이 공개됐다.

190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최영숙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중국을 떠났다. 중국의 회문 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926년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다.


최영숙은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롬 대학교서 정치경제학과를 전공했다. 또 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일본어, 중국어를 섭렵한 후 통역사로 활약, 스웨덴 황태자의 번역일을 맡을 정도로 유능했다.

대학교 졸업 후 세계 여행까지 떠났다. 이때 인도인 청년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고국 여성들의 삶을 구원하겠다는 꿈을 놓지 못했다. 결국 "다음 민족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계급 청년의 삶의 길을 찾겠다"며 귀국길에 오른다.

조선 최초 여성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유학 생활을 하는 사이 가정형편은 크게 기울었던 것.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영숙은 "조선으로 돌아와 몸을 던져 살아 있는 경제학을 실천해 보려 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 취직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허나 일자리를 찾아 나서도 여성을 뽑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콩나물 장사를 시작한 그는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장사하며 학생을 위한 교과서 '공민독본'을 썼던 것. 동분서주했던 그는 귀국한 지 5개월 후인 1923년 4월23일 세상을 떠났다. 생활고로 영양실조에 걸렸던 것.


그는 인도인 청년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는데 "돈, 돈, 나는 이제야 돈의 철학을 알았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고 한다.

냉혹한 현실을 경험하고 세상을 떠난 최영숙, 얼마 후 인도인 청년으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고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더욱이 안타까운 사실은 최영숙의 사망 소식은 이내 선정적인 가십거리가 됐다. 그가 사망 전 인도인 청년의 아이를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사실로 도배됐던 것. 엘리트 최영숙은 사라지고, 인도 혼혈아를 임신한 여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영숙은 생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웨덴은 나의 제2 고향이다. 그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한다. 더욱이 나는 동양 여자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몸에 받았다.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부러웠다. 특히 연초 전매국이나 성냥공장 같은 데서 노동하는 여공들까지도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정말이지 부러웠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해 생활비를 빼고도 반은 남았다.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이었다. 더욱이 체육을 즐겨 날마다의 사는 재미가 더없이 호강스러워 보였다"고.

그가 조선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한누리 온라인 뉴스 기자 han62@segye.com
사진=EBS '역사채널e', MBC '서프라이즈' 
영상=유튜브 'EBSCulture (EBS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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