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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탈북자, 아빠는 중국인… 예림이의 워싱턴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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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23 15:00:00 수정 : 2018-10-23 11: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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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한국 사람이에요.”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외곽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예림이(21·여)는 1시간 가량의 인터뷰 말미에 던진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3국 출생 탈북 청소년인 예림이가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경계에 선 아이들’ 시사회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세이브NK 제공

이 대답을 하기까지 얼마나 길고 어두운 시간을 보냈을까. 짐작할 수도 없지만 예림이는 너무나 밝은 모습으로 그간의 일과 앞으로 미국에서 이어질 일정을 담담하게 말했다.

예림이의 엄마는 탈북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 접경지역으로 팔려간 북한 여성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저희 엄마는 북한에서 잘 사셨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었고, 중국으로 넘어와서 인신매매로 팔렸다고 해요. 엄마가 성격이 좀 세요. 첫 번째 남자가 너무 맘에 안들어서 도망치고, 다시 엄마를 돌봐주던 곳으로 가서 다른 곳을 찾다가 지금의 아빠를 만났다고 들었어요.”

예림이의 아빠는 탈북한 엄마를 돈을 주고 산 셈이다. 예림이 엄마는 두 번 팔려간 끝에 지금의 가정을 꾸리게 됐다.

“엄마는 아빠한테 팔려간 것이라서 슬픈데, 아빠는 아빠니까요.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빠잖아요.” 그나마 예림이는 탈북과 인신매매 등을 거친 부모가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한 사례다. 대부분은 가족을 이루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진다고 한다.

중국 접경지에서 살던 예림이가 한국에 온 것은 2007년. 엄마와 함께 지내다가 아빠도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서울 양재동의 탈북청소년 학교인 다음학교에 다닌다.

“내년에 졸업할 것”이라고 말하는 예림이가 미국에 온 것은 친구 유나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 위해서다. 세이브NK는 제3국 출생 탈북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경계에 선 아이들’을 제작, 한국에서 상영했다. 이번에는 조지워싱턴대, 조지타운대, 하버드 케네디스쿨, 펜실베이니아대, 콜롬비아대 등 몇몇 미국 대학에서 소규모 상영회를 여는데 예림이가 동행한 것이다.

미국에 온 소감을 물었더니 예림이는 “4년 전에 미션트립으로 미국에 와봤는데 그때 길을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그때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두번째 방문인 예림이는 오직 ‘제3국 출생 청소년에 대해 어떻게 잘 알릴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고 했다.

예림이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짬을 내 워싱턴 관광에도 나섰다. 백악관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은 예림이에게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물었다.
제3국 출생 탈북 청소년을 다룬 다큐멘터리 ‘경계에 선 아이들’ 상영을 위해 미국을 찾은 예림이가 지난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백악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이브NK 제공

“한국만 해도 탈북민에 대해서만 알고 제3국 출생 청소년은 전혀 몰라요. 갈수록 제3국 출생 청소년이 늘고 있으니 이런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뭘까.

예림이는 “그나마 저는 나은 편인데, 중국에서 국적없이 살다가 한국에 와서 보니 엄마는 탈북민이고 아빠는 엄마를 돈주고 산 범죄자라는 것을 알게되기도 해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혼란을 먼저 겪은 누나로서 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예림이는 “저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는데, 선생님이나 엄마가 혼내기도 하고 잘 다독여줘서 나쁜 진로로 가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예림이가 살던 중국 접경지를 방문, 예림이 가족의 흔적들을 추적하고 당시의 감정과 상황 등을 담았다. 다큐멘터리가 상영됐을 때 다음학교는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기 꺼렸던 어두운 과거가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예림이는 “학교에서 비슷한 처지인 친구들 중에는 그냥 힘들고 아픈 기억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입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혼자 속상해하는 것보다 함께 극복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이번 다큐멘터리가 국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신매매를 당한 탈북 여성들의 자녀들에게 호적을 내주지 않는 중국 당국의 정책이 당장 바뀔리도 만무하다. 예림이는 남북과 북미가 대화에 나서고 있는 이 시점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자기같은 존재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비슷한 처지의 동생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예림이가 “나는 어느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본 적 있는데, 엄마는 농반진반으로 “너는 ‘짝퉁’인 셈이지”라고 대답한 적 있다고 한다. 예림이는 이번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비슷한 친구들 이야기들을 여럿 접했고, 스스로 정체성에 확고한 답을 얻었다고 했다. 최근 인터뷰에서 예림이가 “나는 그냥 한국 사람”이라고 힘줘 말한 배경이다.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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