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삶과문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관련이슈 삶과 문화

입력 : 2018-08-24 20:53:11 수정 : 2018-08-24 20:53:11

인쇄 메일 url 공유 - +

‘실향’ 그 자체로 고통·슬픔의 단어/ 마음대로 갈 수 없어서 더 애달파/ 北인권 문제 실향민에게도 해당/ 남북 위정자들, ‘향수의 깃발’ 봐야 지난 20일부터 26일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고 있다. 이산가족들은 꿈에도 잊지 못할 혈육을 만나고 있다.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들의 비애와 환희의 깊이를 체감하지 못한다. 가족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이산가족 상봉은 누구든 반기며 성원하는 일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측면도 많다.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빠듯한 시간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상봉 행사장’이라는 이 야박한 명칭의 제한된 장소에서만 가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을 만나고는 있지만 꿈에도 그리는 고향에는 가보지 못하고 있다. 실향민(失鄕民)이기 때문이다.

김용석 철학자
실향, 이 말은 그 자체로 고통의 언어이다. 말 자체가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 슬픔의 언어이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는 사건이다.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고향을 잃은 것은 아니다. 언제든 마음먹으면 고향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향의 조건에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고향’ 때문에 느끼는 고통은 가늠하기 어렵다. 아니 ‘죽기 전에 가보지 못할 고향’이라는 잠재적 두려움의 크기는 또 어떠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 일반적으로 타향살이 하는 사람이 느끼는 향수와 실향민이 절감하는 향수의 정도가 전혀 다른 이유가 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곧 향수를 뜻하는 단어로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말은 ‘노스탤지어’이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귀환(nostos)’과 ‘고통(algia)’의 합성어이다. ‘돌아가고 싶어서 괴로워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고통의 이유를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는 필요성이 모든 진실의 조건”이라고 했다. 향수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고통의 심연에서 인간의 진실을 알아보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식욕, 성욕 등 여러 가지 일상적 본능이 있지만, 때론 이보다 더욱 우리를 사로잡는 본능이 있다. ‘귀소 본능’이 그것이다. 많은 동물이 멀리 떠났다가도 원래 둥지와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먼 대양으로 나갔던 연어의 지난한 귀환의 여로는 감동적이다.

이런 귀소성을 인간 감정의 차원에서 표현한 것이 향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인 것 같다. 향수는 가장 없앨 수 없는 감정이자, 사람의 그 어떤 감정보다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의 어디서든 향수의 의미를 담고 있는 광경을 그려 볼 수 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은 휘날리는 깃발에서 원초적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보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고향에 돌아가고파 괴로워하는 실향민도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들고 있다.

청마는 또 이렇게 노래했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하지만 실향민은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담은 ‘향수의 깃발’을 고향 하늘을 향해 매일같이 달고 있다. 오죽하면 월남 실향민을 위해 ‘노스탤지어(north+talgia)’라는 신조어까지 생겼겠는가.

남북의 위정자들은 실향민의 저 애달픈 향수의 깃발을 보아야 한다. 향수가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이라면 그것은 문화인류학적 차원에서 ‘인권의 문제’이다. 향수의 감정을 실현할 수 있는, 즉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이런 문화적 인권을 존중하는 일이다.

북한 인권 문제는 북한 주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 밖에 있으면서도 기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실향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꿈같은 희망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실향민이 고향을 찾아가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충분히 유의미할 수 있다. 실향민과 그 후손들에게 진정한 귀향의 기회를 적극 마련하고자 할 때, 북한은 국제적으로 인권 의식과 그 실천이 향상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김용석 철학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아이들 슈화 '깜찍한 볼하트'
  • 아이들 슈화 '깜찍한 볼하트'
  • 아이들 미연 '깜찍한 볼하트'
  • 이민정 '반가운 손인사'
  • 이즈나 정세비 '빛나는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