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여사는 오로지 축적한 부의 크기로 한 인간의 성공 여부를 평가해왔다. 물론 M여사 본인도 내 눈에는 엄청난 부자로 보였다. 다만 여사 스스로는 포만감을 갖지 못했다. 어디에 살고, 무슨 차를 타고, 무슨 브랜드를 휘감고 다니느냐로 누군가의 등급을 매기는 여사이긴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소설가의 ‘하찮은’ 재주를 고려해 그나마 가식이라도 떨 줄 알았다. “뭐,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이라고.
세상에는 또 다른 Q선생과 수많은 M여사가 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사람과 나를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 한데 모여 엎치락뒤치락하는 곳이다. 살다 보니 단련이 됐다. 이해 불가능한 상대를 만나면 그저 소심하게 중얼거릴 뿐이다. “만약 내가 그보다 오래 산다면 그의 마지막을 볼 수 있어 좋으련만.”
사필귀정인가? 내게 옳고 그름을 심사할 권한은 없다. 꽁해서 퍼붓는 악담은 더욱 아니다. 나는 단지 궁금했다. 한 개인이 일생 견지한 가치관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형태로 완성되는지. 과연 자신의 삶이 성공적이었노라 긍정할 수 있을지. 그가 그 자신이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우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을 따름이다. 소설가란 세상 속의 인간을, 모순투성이인 존재의 입체적 내면을 탐구하는 직업이 아니던가.
Q선생의 병환이 깊다는 소식이 들린다. 갑작스럽긴 해도 연배가 있는지라 놀라지는 않았다. M여사의 건강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 또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Q선생이든 M여사든 나든 그 누구든,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굳이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먼 일처럼 여기고 있었을 뿐.
오늘이 내 남은 날의 시작인 것처럼, 오늘이 내 남은 날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관점의 전환은 왜 이다지도 어려운 것일까. 주어진 시간이 언제나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 마지막 시간은 어떨까. 가장 궁금한 것은 그때의 내 모습이다.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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