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당시 북한은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고 했다. “북한에게 미국 대통령의 방북은 불량국가라는 불명예를 씻는 동시에 합법적인 주권국가임을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북·미 정상이 만날 만한 곳은 평양밖에 없었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밤 싱가포르 명소들을 둘러봤다.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전망대에서 싱가포르 야경을 감상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한의 미래에 관한 자기 나름의 꿈을 꾸었을까. 이 자리에서 “싱가포르가 듣던 바대로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건물마다 특색이 있다. 앞으로 여러 분야에서 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많이 배우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북한 매체가 전했다. 북한 경제발전 모델로 싱가포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다.
다음날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는 “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든 걸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했다. 폐쇄와 고립으로 점철된 과거와 결별하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선대의 북·미 정상회담 불발에 대한 회한도 엿볼 수 있다. 공동성명 서명식에선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김 위원장은 올 들어 경제 회생에 각별한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 배급체제가 무너져 장마당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주민통제는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4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선 “인민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마련해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난달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할 때는 경제개혁·개방에 나설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국제 외교무대에 백번 서는 것보다 경제를 살리는 게 정상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 뜻이 확고하다면 갈 길은 분명하다. 허술한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구멍들을 메우기 위한 북·미 후속 협상이 예고됐지만 북한은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서 확인한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조치들을 서둘러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대북 경제지원이나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
북한은 이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향한 긴 경주의 출발점에 들어섰다. 어떻게 출발하느냐는 경주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국제사회에 확인시켜 주는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 이유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국내외 평가는 박하지만, 국제사회 대북제재가 강고하게 유지되는 한 기대해 볼 만한 일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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