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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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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4 21:20:07 수정 : 2018-04-24 22: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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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典獄署)는 조선시대에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오늘날의 교도소 같은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이행 등이 편찬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옥서 항목이 있다. “중부 서린방에 있다. 개국 초에 고려의 제도를 따라 두었는데, 죄수를 맡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의 터가 매우 길하기 때문에 여기에 옥(獄)을 두어 죄수들로 하여금 여위고 죽는 우환을 없게 하고자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은 문집 ‘임하필기’에 “전옥서 안에 유명한 샘이 있는데, 샘가에 서 있는 묵은 구기자나무의 뿌리가 우물 속으로 서려 들어갔다. 죄인이 형장(刑杖)을 맞은 뒤에 그 물로 씻으면 낫지 않는 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일대가 전옥서 터다. 조선 말기에 일제 침탈과 봉건 지배에 맞선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이 어제 이곳에 세워졌다. 그가 전옥서에서 순국한 지 정확히 123년이 되는 날이다.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가 국민성금을 모아 세운 동상은 일본영사관에서 조사받은 뒤 들것에 실려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을 담았다.

전라도 고부지방 동학접주였던 그는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못이겨 농민들과 함께 봉기한 뒤 ‘보국안민(報國安民)’을 내걸고 동학농민군을 이끌어 호남 지역을 장악했다. 이어 관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농민자치기구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해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 내정에 간섭하자 다시 봉기했으나 공주 우금치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했다. 서울로 압송돼 전옥서에 수감됐고 1895년 4월23일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인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니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했다. 이튿날 새벽 다른 동학 지도자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을 기린 그 시대 사람들의 민요다. 녹두는 키가 작지만 다부졌던 그의 별명이다. 전봉준 동상은 그가 종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구도다. 동상 앞을 지날 때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로 할 일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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