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가 바다에 너무 가까우면 조수가 침입할 것입니다. 육지에 파면 공역이 클 것입니다.”
태종은 중국에서는 성공했는데, 해보지도 않고 겁을 먹고 있다고 꾸짖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운하를 통해 조운을 하는 것이 건강(建康)에서 북경에까지 이른다. 뜻을 두고 판다면 어째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느냐.”
류량은 조선의 토질은 중국과 다르다고 태종의 견해를 공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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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의 앞바다. ‘안흥량’이라 불리었던 곳으로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
‘안흥량’(安興梁)이 문제였습니다. 지금의 충남 태안 서쪽 끝인 신진도와 마도 주변의 해역입니다. 바다가 워낙 거칠어 항해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의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리다 안전한 운항에 대한 기원을 담아 안흥량으로 고쳐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 곳에서 침몰 사고가 잇따르자, 조선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안흥량을 피해갈 운하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태종과 현실적인 대책이 아니라는 신하들간의 언쟁인 것입니다.
안흥량에서의 조운선(국가에 세금으로 내는 미곡 등을 지방에서 실어나르던 선박) 침몰로 인한 피해는 전쟁 때의 그것을 방불할 만큼 심각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 4년(1395)부터 세조 1년(1455)까지 60년간 200척의 경상도, 전라도 조운선이 침몰했습니다. 알려진 것만 1200명이 죽었고, 1만5800석의 미곡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같은 피해는 이전부터 계속된 것이라 고려시대에도 시도가 되었습니다.
◆인당수·손돌목·울돌목, 그리고 안흥량,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바다
당시 안흥량은 그만큼 무서운 바다였습니다. 거칠기로 유명한 4대 해역이 있었습니다. 심청이가 몸을 던져 거센 물결을 잠재웠다는 황해도의 ‘인당수’,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군을 피해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천도할 때 길목이 되었던 강화도 ‘손돌목’, 거친 물살을 이용해 왜군 함대를 수장시킨 명량대첩의 바다 전남의 ‘울돌목’, 그리고 수많은 배들을 집어삼킨 충남의 안흥량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를 방문한 뒤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안흥량을 “기괴하다”고 묘사했습니다. 서해를 건넌 서긍은 안흥량을 통해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바위 하나가 바다로 잠겨들어 있어, 격렬한 파도는 회오리 치고, 들이치는 여울 세찬 것이 매우 기괴한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아래를 지나는 배들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암초에 부딪힐까 염려하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합니다.
“안흥정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다.”
안흥량은 해안선의 들고나감이 심합니다. 크고 작은 섬들이 분포하고 있고, 암초와 기복이 심한 해저의 지형 때문에 조류 또한 급합니다. 억센 조류는 해저의 바위나 섬들에 부딪혀 소용돌이칩니다. 조수 간만의 큰 차이도 항해를 어렵게 합니다. 간조 때에는 넓은 해역이 갯벌로 변합니다. 바닷물이 급격하게 빠지는 현상은 연안에 근접해서 운항하던 배들의 발목을 단단히 잡았고, 간조 때 항해하는 것은 위험해 만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반복되는 험악한 풍랑, 빈도가 높은 안개까지….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 배를 운행했을 것이나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니 선원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쓸데없이 힘만 뺐다”…끝내 실패한 운하건설
필시 피해가고 싶은 바다였겠죠. 그러나 충청 이남에서 출발해 왕도로 향하는 배는 반드시 거쳐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운하 건설을 시도했던 것인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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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서해 항로와 안흥량을 피하기 위해 만든 운하의 위치. 문화재청 제공 |
조선 개국 후에는 태종 12년(1412) 하륜의 제안으로 운하 건설에 나섰습니다. 1413년 5000명의 백성을 동원해 2개월 만에 굴포운하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150석 정도를 실은 작은 배가 통과할 수 있을 뿐 그보다 훨씬 큰 조운선이 운항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운하 내부에 암석이 있어 장애가 되었고, 가뭄으로 수량이 적을 때는 아예 운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쓸데없이 민력(民力)만 낭비했을 뿐 조운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당대의 평가는 혹독했습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역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인조대(1623~1649)에는 안면운하가 만들어져 지금도 활용되지만 안흥량을 피해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어서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습니다. 운하 건설이 번번이 실패하자 안흥량을 통과하는 지역에서만 육로로 운반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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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의 바다에서 발굴한 유물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이 정리하고 있다. |
시간은 종종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듭니다. 안흥량에 수장된 많은 선박, 그것과 운명을 함께 했을 수많은 목숨들, 그로 인한 슬픔과 탄식이 얼마나 컸겠습니다.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불행은 한국수중고고학의 가장 눈부신 성과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안흥량, 곧 지금의 태안 앞바다는 ‘바다의 경주’라 불릴 만큼 수많은 유물을 토해냈습니다. 수중발굴 성과의 30% 정도가 태안 바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14척의 고선박 중 태안선과 마도1·2·3·4호선 5척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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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의 당암포 해역에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당암포 바다 속에 잠들어 있는 유물은 어떤 사연을 가진 것들일까요? 안흥량을 피해보려 이 곳으로 배를 돌렸으나 그마저도 침몰을 피할 수는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원래 이 바다로 항해할 예정이었을까요?
이런저런 상상을 자극하는 바다입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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