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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제청(提請)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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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01 21:01:10 수정 : 2018-04-01 2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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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들 총리 제청권 무시 / 文정부도 “총리 권한 강화” 말뿐 / 국회서 총리 추천 또는 선출 땐 / ‘장관임명 제청권’ 실질 보장 가능 김대중(DJ)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3일 고건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DJ와 독대했다. 김종필(JP) 총재와의 이른바 ‘DJP연합’으로 탄생한 새 정부의 첫 총리로는 JP가 내정됐다. 하지만 여소야대 정국이어서 당장 총리 임명동의안 통과가 어렵다 보니 지난 김영삼(YS)정부 시절 임명된 고 총리가 DJ정부와 잠시 ‘어색한 동거’를 했다. DJ는 ‘물러나기 전 새 정부 장관 임명을 제청해 달라’고 부탁했고 고 총리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대통령은 서류 한 장을 들고 앉아 쭉 읽었다. 새 정부 내각이다 보니 명단이 길었다. 물론 내 앞에 명단이 적힌 종이는 없었다. 그동안 대통령과 총리 간 장관 인선 논의가 ‘협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었다.”(‘고건 회고록’ 중에서)

제청이란 ‘어떤 안건을 제시하며 결정할 것을 청구한다’는 의미다. 현행 헌법 87조 1항은 ‘국무위원은 국무총리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94조는 ‘행정 각부 장관은 국무위원 중에서 국무총리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각각 규정했다. 당연히 총리가 내각 명단을 만들어 대통령한테 임명을 요구하는 형태가 정상적이다. 그런데 거꾸로 대통령이 이미 다 정한 인사를 총리가 나중에 건의하는 외양만 갖추고선 그걸 ‘제청’이라고 부른다.

‘20년 전의 옛날 일 아니냐’, ‘지금은 달라졌겠지’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도 안 바뀌었다. 이낙연 총리는 후보자 시절인 지난해 5월24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대통령을 상대로 총리의 장관 임명제청권을 확실히 행사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 총리는 “제청권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며 “총리가 하라는 대로 (대통령이) 하는 것이 제청권이라면 헌법 근거가 무너진다”고 슬그머니 발을 뺐다.

제청권이 총리한테만 있는 건 아니다. 헌법 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김명수 대법원장도 지난해 9월13일 청문회장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김 대법원장은 단호한 어조로 “내 의지를 관철하겠다”며 “대통령이 추천하거나 원하는 인사가 적절하지 않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대법원장에게는 이토록 ‘명쾌한’ 제청이 총리한테만 ‘애매한’ 개념이 된 까닭은 뭘까. 역대 대통령들이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가급적 보장한 반면 총리의 제청권은 대놓고 무시한 것이 근본 원인이다. 대법관이야 누가 되든 대세에 큰 지장이 없지만 장관만큼은 확실히 ‘내 사람’을 앉혀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문재인정부 청와대가 최근 대통령 연임제 개헌안을 발의하며 “대통령 권한은 줄이고 총리 권한은 강화했다”고 강조했다.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과 야당의 극심한 거부감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대통령과 총리의 관계를 규정한 개헌안 조문들을 아무리 뜯어봐도 현행 헌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돼 있는 현행 헌법 86조 2항에서 ‘대통령의 명을 받아’란 구절을 삭제한 게 전부다. 겨우 이 정도를 갖고 ‘책임총리에 근접했다’는 식의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총리의 장관 임명제청권은 이번 개헌안도 그대로 채택했다. 하지만 이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관한 설명은 전혀 없다. YS정부의 총리를 지낸 이회창 전 대법관은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대통령은 각료 후보자들 인적사항을 확인할 수단인 정보와 자료를 갖고 있으나 총리는 그런 수단이 없다”며 “총리가 그런 수단을 갖도록 제도화되지 않는 한 독자적 임명제청권 행사는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

개헌안 기초자들은 지금처럼 청와대가 내정한 장관 명단을 사후에 통보받은 총리가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대등하게 인선을 협의한 것처럼 허울만 꾸미면 된다고 여기는 걸까. 속으로 ‘제청이 원래 그런 거지 뭐’ 하고 씩 웃으면서 말이다. 총리의 장권 임명제청권 실질화를 위해서라도 야당들의 주장처럼 국회가 총리를 추천 또는 선출하는 조항이 새 헌법에 꼭 명시돼야 한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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