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말인가.” 금융감독원이 ‘물검사’ 논란으로 시끄럽다. 익명 사회관계망인 블라인드앱이 비판 글로 달아올랐다. 최근 검사부서에 배포된 ‘검사자료 요구에 관한 실무지침’이 화근이다.
“금융회사가 업무보고서, 전자공시시스템, CPC시스템(금감원·금융회사 직통 자료 제출 시스템)으로 이미 제출한 자료 중 중복자료가 있으면 자료요구를 하지 말라.”,“검사현장에서는 사실관계 확인 등 불가피한 경우에만 자료를 요구하라.”….
실무지침은 금융회사의 불필요한 검사자료 작성 부담을 덜어주려는 취지인데, 일선 검사역들은 “취지는 이해하지만 현장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탁상행정”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한 검사부서 관계자는 27일 “막상 검사를 나가보면 금융회사에서 제출한 업무보고서 등의 자료가 원시장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해당 지침은 금융회사가 제출한 자료가 모두 정확하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저축은행이나 농·수협 등 내부통제제도가 취약한 금융회사의 경우 자료의 오기는 물론 허위자료를 제출하는 경우가 적잖은데, 검사현장에서 자료요구를 최소화하라는 지침은 검사역들에게 총 없이 전쟁터에 나가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실제 과거 파산한 저축은행들의 경우 평소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지만 막상 정밀검사를 해보니 부실채권을 정상채권으로 허위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비밀장부를 따로 갖고 있던 저축은행도 있었다. 이 관계자는 “현장에서 자료를 받지 말라고 하면 위험성이 높은 금융회사는 검사하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중복자료 요구를 피하라는 지침에 대해서도 “여러 부서가 요구한 자료를 일선 검사팀이 모두 파악해서 중복자료 여부를 파악하라는 것은 검사부서의 손발을 스스로 묶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나온다. 검사역 A씨는 “한마디로 팔다리 다 잘라서 현장검사 나가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A씨는 “진웅섭 원장 때부터 종합검사 없애라, 문답도 받지 마라고 하는 등 검사 힘을 뺐는데 이제 현장서 자료요구도 못하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는 거죠”라며 혀를 찼다.


‘물검사’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형식적 검사로 금융사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며 ‘물검사’를 걱정하는 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금감원은 워치독으로서 금융시장의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경고음을 내는 게 주임무이고 바로 그 위험을 감지하는 일이 검사인데, 내부에서 그 ‘본질적 업무’가 의심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금융당국 수뇌가 강조한 ‘시장친화적 검사’의 결과다.
이 때문에 “저축은행 사태와 동양사태가 발생한 것이 불과 5~6년 전인데 앞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시스템 안전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금융회사가 불편하다는 일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는 게 현재 금감원의 현주소”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금융회사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검사도 줄이고 자료요구도 줄인다면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금융소비자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유능한 외과의사도 수술을 계속 하지 않으면 실력이 줄 수 밖에 없는데, 현재 금감원 검사부서의 상황이 그렇다”면서 “이렇게 검사부서의 힘을 빼다가는 드라마 ‘하얀거탑’에서처럼 수술 장면만 보여주고 뇌수술을 시키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금감원 고위관계자는 “검사를 세게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자료 요구는 자제해 금융사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라며 “시대 변화에 맞춰 검사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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