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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가능케 한 스포츠 외교…'핑퐁 외교'부터 '평창'까지

입력 : 2018-02-14 07:41:00 수정 : 2018-02-12 16: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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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앞세워 공동입장하고 있는 남과북의 대표선수들. 평창=남정탁 기자

스포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국제올림픽 위원회(IOC)도 올림픽 등에서의 정치적 행위를 엄금하고 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스포츠야말로 정치외교적으로 가장 효과적이고 중요한 수단이다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비정치적인 스포츠 행사를 통해 가장 정치적인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 세계역사 흐름을 바꿔놓은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

1971년 4월 베이징에서 열렸던 중국과 미국의 친선경기. 핑퐁외교는 미국과 중국 국교 수립과 함께 중국을 국제무대로 등장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스포츠 외교사에 있어 '핑퐁외교(ping-pong diplomacy)'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기 힘들다.

핑퐁외교는 1971년 일본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을 기점으로 펼쳐졌던 미국과 중국의 물밑 협상과 국교정상화 과정을 말한다.

당시 나고야 세계탁구 선수권에 대표단을 출전시킨 중국은 대회 후 그해 4월 미국대표팀 15명을 베이징으로 공식초청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이래 미국과 가진 첫번째 공식교류로 국제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한 닉슨(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중국 지도자 마우쩌둥의 손을 잡으며 반가움을 표하고 있다.

이 후 헨리 키신저 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해 주언라이 수상과 만나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마오쪄둥 주석과의 미중 정상회담, 양국 수교 문제 등을 의논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인 72년 2월 중국을 방문해 역사적인 미중 정상회담을 했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기초 다리를 놓았다. 미국과 중국은 1979년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잠재는 거인 중국은 핑퐁외교를 통해 세계무대로 본격 진출, 지금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양대 강국으로 위세를 뽐내고 있다.

동서독 간의 스포츠 교류도 정치관계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1972년 12월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전까지는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2차 대전 후 동서독 정부수립 시까지는 교류가 전혀 없었고 1950년부터 동독 측의 제안으로 전 독일선수권대회, 전 독일 체육회담 및 전 독일 체육인회담 등이 개최되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동독 측이 서방진영의 결속과 서독의 서구편입을 방해하기 위해 스포츠 교류를 정치선전장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 1990년 남북 통일축구, 1991년 탁구 축구 단일팀, 공동 입장

1990베이징 아시안게임이 끝난 직후인 10월 평양과 서울서 열렸던 남북통일축구대회.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국과 북한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 적과 적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이후 7·4 공동성명, 남북 적십자 회담 등 이런 저런 움직임이 있었지만 역시 스포츠가 가장 효과적 수단으로 등장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끝난 직후인 10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남북통일축구가 열려 '통일의 꿈'이 무르 익었다.

이듬해인 1991년 1~2월 지바세계탁구선수권 남북 단일팀, 그해 6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이 출전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1991년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 단일팀 주역인 유남규, 현정화, 김성희, 이분희(왼쪽부터)이 힘모아 좋은 성적을 내자는 의미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후 단일팀은 성사되지 못했지만 2000시드니올림픽 남북 공동입장을 시작으로 2018평창동계올림픽까지 국제대회에서 10번이나 남북이 함께 손을 잡고 입장했다.

또 2018평창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는 27년만이자 사상 3번째로 한반도기를 단 단일팀을 꾸려 출전했다.

▲ 동서독은 6차례 단일팀 꾸려 올림픽 나섰으나 효과는 신통치 못해    1945년 패전 후 동서로 분단된 서독과 독일은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 모두 6차례 연속 단일팀을 꾸려 동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하지만 단일팀 효과는 신통치 못했다.

1989년 통일 직전의 동독축구 대표팀. 서독과 동독은 올림픽에 6연속 단일팀을 이뤄 나갔지만 각자 계산이 틀려 단일팀 성과를 정치 사회적으로 끌어 올리진 못했다.

이는 단일팀을 체제우월 선저노가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으로 규정한 서독과 국제적 지위 향상과 IOC(국제올림픽 위원회) 정식 가입을 위해 단일팀을 도구로 사용한 동독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서로 딴 곳을 봤기에 잘 될리 없었다.

▲ 올림픽은 치열한 외교전의 무대, '평창외교'가 그 절정

전세계 모든 국가가 정치적, 인종적 편견없이 평등하게 참여하는 거의 유일한 무대가 올림픽이다. 모든 국가가 모이는 장소인만큼 올림픽을 이용한 외교전은 매번 치열했다.

진영 논리에 따라 서로 상대방 대회를 보이콧(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서방진영 불참, 1984년 LA올림픽에 공산진영 불참)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올림픽을 계기로 주최국은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 일본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우리가 그랬다.

이에 더해서 2018평창올림픽은 가장 위험한 갈등지역이라는 남과북이 하나(단일팀)가 됐고 북한 최고 권력자의 여동생이 청와대를 찾아 방북을 초청하는 새로운 형태의 올림픽 외교를 선 보였다.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을 지켜 보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뒷줄 오른쪽부터). 사진=연합뉴스

비정치적이라는 올림픽이 아니면 국제사회가 제재대상으로 삼고 있는 북측 권력자들이 보란듯 남쪽 땅을 밟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평창외교가 핑퐁외교처럼 역사적 전환을 가져올 지 궁금하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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