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 안에는 고요가 흘렀다. 이른 아침 학교에서 맛볼 수 있었던,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그 방에는 남들보다 일찍 등교했을 때 교실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과 얼마간의 자유가 있었다. 각각의 선은 서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모든 게 빈틈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비에른이라는 남자가 관공서의 한 파트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는 55분 철저하게 자기 일에 복무하고 5분은 휴식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그 5분 동안 자신이 발견한 비밀스러운 방에 들어가 쉬었다. 그곳에 가면 마음이 정화되는 행복이 찾아왔다. 고요하고 여유롭고 완벽한 방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그의 휴식 행위를 두고 사무실 직원들이 그를 이상한 정신병자로 보는 데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 방은 보이지 않았고, 비에른이 단지 벽 앞에 가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무실 분위기를 망친다고 항의하는 직원들에게 부서장은 이렇게 다독인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모두 똑같지 않다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뭐라고 해야 할까? 약간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주 유익할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성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 생활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런가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인데도 다른 남자 직원은 말한다. “하지만 그는 미쳤어요! 누구라도 그걸 알 수 있어요. 일이 바빠지면 그 즉시 복도로 뛰쳐나가 벽이나 노려보고 있는 얼간이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더 나아가 비에른을 해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그곳에 그런 식으로 서 있는 걸 볼 때마다 정말 오싹한 기분이 들어요. 그는 아주……, 마치 허울만 그곳에 남겨두고 어디론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거든요.”
스웨덴 유명 배우이자 극작가 요나스 칼손. 다른 이는 볼 수 없는 ‘방’을 소재로 모순된 인간들의 자화상을 그려낸 그는 스웨덴의 카프카라는 별명을 얻었다. 푸른숲 제공 |
스웨덴의 카프카요, 독특한 사무원의 전형 ‘필경사 바틀비’를 창조한 멜빌을 방불케 한다는 상찬을 받은 소설이다. 자신을 괴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시련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면서 “나는 쉽게 속이고 속아 넘어가는 이 세상에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이라는 걸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문득 깨달았다”고 되뇌는 비에른. 이 남자의 캐릭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원한다. 그 방안에 스스로 유폐되어 바깥과 소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이들의 방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납득할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것도 문제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광장의 광대 같은 삶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모두 비에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지점에서부터 행복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 윤미연의 말이 서글프다.
“숨을 곳을 찾지 못해 끝내 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버린 것도 하나의 비극이겠지만 자기 자신이 비에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역시 아주, 아주 가슴 아픈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은 코미디를 낳는다. 슬픈 코미디.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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