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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화판에 담아 낸 빛과 시공간의 세계

입력 : 2017-11-28 21:02:20 수정 : 2017-11-28 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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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선으로 그림 그리는 황선태 작가 작가는 어느 날 작업실 책상에 흠뻑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감전(?)됐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빛의 세례였다. 그동안 대상을 평면에 그럴듯하게 묘사하기 위해 허상의 빛만 그려오지 않았던가. 빛 자체, 물질로서의 빛을 그릴 수는 없는 것인가. 작가는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황선태 작가가 LED 빛과 유리판 위의 선 드로잉으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다.

“빛은 사물과 공간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기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사물을 감싸고 있는 빛이라는 존재가 사물을 규정하는 큰 요소이기에 그 빛을 이용하여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 보는 것입니다.”

그의 작업은 LED 빛이라는 실제의 3차원적 재료에 의해 구성된 2차원의 세계다. 즉 실제의 빛이 가상의 빛인 그림의 빛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하지만 평면도감 같은 2차원적 선들이 빛과 만나면서 공간을 창출한다.

“평면과 공간 사이의 중간 어디에 머무르는 익숙하지만 생경한 상황을 접하게 되지요. 그런데 제 작품내의 빛은 기실 언제나 3차원으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2차원과 3차원의 관계놀이라 할 수 있지요.”

황선태 작가는 “어떤 사물이나 공간에 대한 인식은 빛을 근간으로 하는 감흥이나 조형적 아름다움 같은 경험에서 비롯된다”며 “앞으로도 빛이라는 사물에 더 집중을 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림의 빛과 실제의 빛 사이에서, 그리고 그 빛과 공간의 연출에 따라 4차원의 시간성도 머리를 내민다.

“공간이나 시간, 저는 이것들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도 아니며 철학자도 아닙니다. 단지 내 주변의 일상들을 소소하게 해석해 보고 다른 각도로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 작업에서 이렇게 존재하는 사물(선, 빛, 공간, 시간 혹은 다른 것)들을 저의 작은 연출을 통해 막연하게 인식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어 감정을 자극할 수 있기를 바라지요.”

그는 컴퓨터상에서 선을 그리고 빛을 세팅한 후 그것을 유리 화판에 전사시킨다. 후반작업으로 LED를 화판 뒤에 설치하면 작업이 마무리된다. 정교하게 LED 빛을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다. 때론 실제 공간의 미니어처를 제작해 빛 설계를 가늠해 보면서, 바로 이것을 사진 찍어 컴퓨터작업을 통해 유리화판에 전사시키기도 한다. 그의 작품 속 풍경은 일정한 굵기의 녹색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작업의 큰 틀은 선과 빛이라는 가장 단순한 소재를 갖고 사물을 해석해보려는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주변엔 다양한 정보들이 많습니다. 많은 정보들을 지워내고 가장 단순한 연결고리들만 남기면 사물의 본질에 가깝게 되지요.”

그는 한국화의 필선처럼 선을 중시한다. 모든 빛을 머금은 먹색과 선을 중시하는 수묵화의 정신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선은 물리적 실존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산물입니다. 선이 과연 진짜 있을까요? 외곽선을 인식할 따름입니다. 일상의 범주에서 생각할 때 ‘있다’라고 함은 오감에 의해 증명된 물리적 존재를 말하는데 이 조건으로 따진다면 선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식됨’도 ‘있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림이나 수학의 도형, 혹은 글자의 선은 엄밀히 말하면 선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타자와 서로 간에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약속된 기호입니다. 우리가 도화지에 그리는 선도 수학의 숫자나 철자와 같은 연상을 돕기 위한 도구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착안하여 사물을 기호로 인식하는 방법으로 선을 이용합니다.”

사실 빛이 없다면 선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가 빛과 선에 매달리는 이유다.

“저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선을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선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말하는 드로잉으로서 그리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호(알파벳이나 숫자와 같은)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합니다.”

그의 작품이 감정이 없는 중성(中性)적 존재로 다가오는 요인이다. 그것이 어떤 차원에서도 자유로운 모호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의 인지 속에서만 존재하는 선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존재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운동하고 있으며 상호 소통을 통해서 교류하고 분리와 통합을 통해 차원변화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사물이 생성되기 때문에 인식 그 자체도 존재하는 것이고 인식의 산물인 선 역시 살아있는 존재자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존재자로서의 선의 색깔을 녹색으로 선택했다. 가장 자연에 어울리고 가까운 색이란 생각에서다. 선으로 그리는 이미지도 생동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제 작업에서 일상의 소재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우선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성격이나 사건은 어떤 선입견이나 담론으로 본질이 가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솔직하게 나옵니다.”

그는 작업의 소재로 쓰이는 사물들은 가능한 한 변형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하려고 한다. 창의적 사고는 하되 사물이 갖고 있는 본성을 넘어서는 과도한 상상은 지양한다는 얘기다. 가장 적은 변형으로 사물 본연의 역사와 내용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저는 창조자가 아닌 발견자일 뿐입니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을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때도 저는 정확하게 사물을 이해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신이 아닌 이상 완전무결은 없기 때문이지요. 사물을 바라볼 때는 주의해야 합니다. 사건을 바라볼 때도 주의해야 하지요. 현상을 바라볼 때도, 역사를 바라볼 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진실은 늘 편집되고, 왜곡되며,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유리소재를 다뤘다는 황 작가의 작품세계를 12월 27일까지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빛, 시간, 공간’전에서 만날 수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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