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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북한의 간판 아나운서인 리춘희가 조선중앙TV를 통해 6차 핵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알리고 있다. 사진=TV조선 캡처 |
종말적 파국까지 우려되는 북한의 6차 핵실험 여파로 남과 북의 긴장이 최고도에 달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부 안보환경도 심상치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화책은 소용없다"며 강경책을 책상 위에 꺼내 놓은 가운데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부 장관은 4일 "북한의 전멸을 바라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압박강도를 높였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 그간 남과 북은 숱한 위기를 넘어왔다.
그 중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놓는 등 전쟁 초읽기 단계까지 치달은 최악의 상황도 두어차례 있었다.
◆사상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했던 '데프콘2' 발령···판문점 도끼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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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으로 남과 북이 전쟁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기폭제가 됐던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당시의 사진.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의 도끼에 숨지자 정전협정 후 처음으로 국군과 미군에 전투대기명령인 '데프콘2'가 발령돼 전군이 완전 무장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빚어졌다. 이후 지금까지 데프콘2 발령은 없었다. |
남과 북이 전선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순간은 1976년 8월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서 비롯됐다.
미국 장교 2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사망, 정전협정 후 처음으로 북한군에 살해당했다.
격분한 한국과 미국은 즉각 응징에 나서 전군에 '데프2콘(전투준비태세)'를 발령했다.
5단계의 데프콘 중 2단계는 '전투준비 완료'를 뜻하는 것으로 ▲휴가·외박 장병의 전원 복귀 ▲부대편제 100% 충원 ▲실탄지급 등 즉시 전투에 투입될 준비를 하게 된다.
한단계 낮은 데프콘3가 발령되면 전시작전권이 한·미 연합사로 넘어가고, 모든 장병을 대상으로 휴가와 외출이 금지된다. 한단계 높은 데프콘1은 전시 동원령이 선포되는 만큼 전쟁을 뜻한다.
정전협정 후 데프콘2가 발령된 것은 1976년 8월 딱 한차례뿐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은 1976년 8월18일 오전 10시45분쯤 일어났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남쪽 유엔군 측 제3초소 앞에서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으로 이루어진 11명의 장병이 우리 근로자의 미루나무 가지치기 등 절단 작업을 호위하던 중 북한군 30여명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미군 소속인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사망했다.
한국은 특전사를 동원해 8월21일 오전 7시 다시 미루나무 제거작전에 들어갔다. 미국은 항공모함 '미드웨이'와 핵무장 폭격기를 출동시켰고, 양국 군은 함께 북한이 작전에 대응하면 개성까지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해 놓았다.
28분 만에 미루나무 제거 작전은 무사히 끝났으며,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감'을 나타내는 구두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당시 휴전선 일대 장병은 완전 무장한 채 초긴장 상태에서 '명령'이 떨어지길 대기했던 살벌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1994년 9월 클린턴의 '영변 핵시설 정밀폭격' 방침, YS가 "전쟁 난다"며 결사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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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여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왼쪽)은 북한의 핵보유를 막기 위해 영변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 작전을 세우고 병력 추가이동 등의 조치를 준비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반대, 미국의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
판문점 도끼사건이 일어난지 18년 후인 1994년 제1차 북핵위기가 닥쳤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인출하자 당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정밀타격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은 항공모함 2척과 함정 33척을 동원해 동해에서 영변 핵시설을 공습하려 했다.
윌리엄 페리 당시 미 국방장관은 "미국은 증원전력을 한반도 주변에 대기시켰고, 추가 전력이 본토에서 한국에 도착하면 북한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았었다"고 당시 상황을 술회했다.
미국 측은 지대공 미사일 배치와 병력 3만명 추가, 순항 미사일 준비 등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러면 전쟁이 일어난다"며 미국의 북한 폭격 계획에 반대, 결국 무산된 바 있다.
앞서 그해 3월19일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판문점 8차 예비접촉 때 북측 박영수 수석대표는 그 유명한 '서울 불바다' 발언을 했다. 이를 계기로 남한에서는 라면 등 몇몇 품목의 사재기 소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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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 '124군'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알린 중앙일보 1면 기사. 생포된 김신조의 사진이 보인다. |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 '124군'의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 1월23일 '푸에블로'호 납북
1968년 초에도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의 특수요원 31명이 1월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틈타 서울에 잠입했다.
이들은 23일 청와대 인근까지 내려와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났고, 결국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우리 군 당국은 현장에서 29명을 사살하고 1명(김신조)을 생포했다.
23일 오후 1시45분엔 동해안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미 해군의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906t급)가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강제 납북됐다.
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북보복을 감행하려 했으나 사태 확산을 우려한 미국이 반대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판문점에서 비밀협상을 펼쳐 1968년 12월 선원들의 귀환에 합의했다.
그해 12월23일 미측 대표 우드워드 소장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해 군사 및 국가기밀에 대한 첩보행위를 수행했다'는 진술서에 서명, 미 장병을 귀환시켰다.
◆2015년 북한의 지뢰 도발과 남북 포격전
북한은 2015년 8월4일 경기도 파주 우리 측 비무장지대(DMZ)에 지뢰를 매설, 국군 부사관 2명이 각각 다리와 발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혔다.
그러자 우리 군은 8월10일 경기 연천과 파주 등 2곳에서 확성기 방송을 11년 만에 재개했다. 이틀 후엔 강원 화천 등 중·동부 2곳에서 추가 실시하기도 했다.
남북 긴장은 8월20일 경기도 연천에서 남과 북이 포탄을 주고 받는 경고성 포격전을 벌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군이 연천군 최전방 서부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 중단을 요구하면서 76.2㎜ 직사화기와 14.5㎜ 고사포로 추정되는 화기로 이날 오후 3시53분과 4시12분에 2차례 걸쳐 화력 도발을 자행했다.
우리 군은 155㎜ 자주포로 군사분계선 북쪽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다.
이와 동시에 인근 지역 주민에 대피령이 내려졌으며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이 소식은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퍼져 전쟁이 날 것처럼 알려졌다.
긴장은 8월23~25일 이어진 남북 간 고위접촉을 통해 해결됐다.
고위급 접촉에 우리는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북측은 황병서 군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당 비서가 각각 나왔다.
당시 북한에서는 잠수함 전력의 70% 규모에 달하는 50여척이 기지를 이탈해 수중으로 전개됐고, 스커드와 '노동 미사일' 기지에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한미 연합군은 'B-52' 전략 폭격기와 핵잠수함 등 전략자산 전개 시점을 협의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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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0분 북한군이 쏜 포탄이 인천 연평도 해병의 'K-9' 자주포 진지에 떨어져 불이 붙고 있다. 해병대원은 서둘러 포 안으로 이동, 대응사격 준비에 들어갔다. |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전군에 '진돗개 하나' 발령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0분 북한은 인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해 해병대원 2명과 민간인 2명을 숨지게 했다. 군인 중상자는 15명, 민간인 중상자는 3명에 각각 달했다.
이는 정전협정 후 북한이 우리 영토를 직접 타격해 민간인을 사상케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군은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곧 전군으로 확대 발령했다.
진돗개는 우리 군의 대비태세를 뜻하는 용어로,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전군이 근무에 투입된다. 일반적으로 대간첩 작전 등에서 특정지역에 발령되는데, 전군에 발령된 것은 이번 포격 때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병대는 17분 후부터 'K9' 자주포로 대응 포격에 나서 북측의 무도 포진지 쪽에 50발, 개머리 포진지 쪽에 30발 총 80여발을 발사했다.
우리 공군도 오후 2시38분 'KF-16' 2대를 긴급 출격시켰으며, KF-16 2대와 'F-15K' 4대를 추가 동원했다.
이에 맞서 북측도 백령도 부근 해안포 입구를 개방,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북측은 170여발을 발사한 뒤인 오후 3시41분 공격을 중단, 연평도 포격에 따른 남북 긴장은 수위가 낮아졌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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