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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독일 통일의 진실’ 알리기 앞장… 염돈재 前 국정원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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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05 06:00:00 수정 : 2017-08-04 23: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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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원동력은 서독의 강한 힘… 교류협력 결실? 한국의 착각이죠”
“빌리 브란트(전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 이른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추진한 정책입니다. 이 정책이 분단의 고통 완화와 민족 동일성 유지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독일 통일은 서독의 접근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가 아니라 동독 주민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망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주독일 한국대사관 공사였던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한국 사회에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신화를 바로잡는 목소리를 내는 몇 안 되는 통독(統獨·독일통일) 전문가다.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 관료, 언론은 그간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을 통독의 일등공신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달 6일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이 바뀌어도 20여년간 지속한 서독 정부의 동방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건국대 초빙교수로 있는 염 전 차장과의 인터뷰는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발표된 이후인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이뤄졌다. 


염 전 차장은 통독의 진짜 원동력은 서독 정부의 힘의 우위 정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친서방·친미 노선을 견지하면서 안보를 튼튼히 하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서독을 동독 주민의 동경 대상으로 만든 것이 통일의 원동력이었지요. 초대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부터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전 총리까지 서독 기민당 정부가 자석 이론에 따라 추진한 힘의 우위 정책이 결실을 거둔 것입니다. 미국의 적극적 지원도 많은 도움이 됐고요.”
그간 한국 사회는 사민당의 동방정책의 역할은 과대평가한 반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기민당 정책과 미국 역할을 간과했다는 게 염 전 차장의 진단이다. 그가 바로잡고자 하는 통독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독일 통일을 흡수통일로만 생각하지 동독 주민이 스스로 선택한 가입식 통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서독이 동독에 막대한 지원을 했다고만 알고 있지 우리처럼 공짜 (대북)지원은 단 한 푼도 없었다는 것도 대부분 모릅니다. 독일 통일 후유증만 얘기했지 독일 사람이 통일비용 때문에 고생하지도 않았고 통일 후 독일이 유럽의 엔진, 유럽의 지갑이 됐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건국대 초빙교수로 근무 중인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시내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통일의 원동력과 국정원 근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동·서독 교류협력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고 한다. “서독의 교류협력 목적은 통일이 아닌 분단 고통의 완화였어요. 서독은 경제교류가 동독의 공산정권을 강화시킨다는 점을 고려해 무상지원과 현금지원은 한 푼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런 확고한 원칙을 지켜야 경제교류가 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염 전 차장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사민당의 주장대로 했다면 독일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사민당은 동독과의 신뢰 관계 손상을 우려해 탈출자 수용 제한, 대규모 경제지원 및 국가연합 방식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다. “사민당 주장을 수용했다면 1년 후 옛 소련이 15개 나라로 분열돼 통일이 훨씬 어려웠을 겁니다.” 


1990∼93년 3년 동안의 독일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염 전 차장은 독일 통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현재도 그러고 있으며 통일이 되는 순간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그것이 성공한 스파이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중앙정보부 공채 5기 합격으로 정보기관 근무를 시작한 그는 해외정보 파트에서 경험을 쌓고 지력(智力)을 단련한 정통 해외정보통이다. 브라질,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 독일 본에서 근무하며 숱한 비밀활동을 수행했다.
“해외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주 임무였습니다. 매일 새로운 임무가 부여돼 늘 긴장 속에서 지내야 했지만 비밀공작 활동은 매우 창조적 작업이어서 재미있고 보람도 컸습니다. 순발력은 부족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능력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일 가운데는 노태우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북방정책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북방정책을 입안하고 비밀교섭으로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 그의 대표작이다. 북방정책의 첫 번째 성과였던 한·헝가리 수교 작전, 즉 코드명 푸른다뉴브 작전에도 핵심 실무자로 참여했다. 한·중 탁구 국가대표인 안재형·자오즈민 선수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은 특별한 작전이었다. 한·중 수교 이전인 1989년 세계적인 탁구 스타 커플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정보기관 역사에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는 정보기관 직원으로 청와대에서 비서관급으로 일한 첫 인물이다. 1995년 이사관을 끝으로 계급정년 퇴직을 한 이후 8년이 지난 2003년 노무현정부에서 해외담당 국정원 제1차장으로 복귀한 것도 그런 사례다. 그는 노태우정부 시절 실세였던 박철언 인맥으로 분류됐던 탓에 새로 들어선 김영삼정부에서 보직을 받지 못했다. 퇴직 직원이 고위직으로 복귀한 첫 사례였다. 이후 꽤 많은 퇴직 인사가 재기용됐다. “1차장 복귀는 운이 좋은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청와대에서 별도 통보가 없어서 언론 보도가 오보인 줄 알았죠. 퇴임하고 나니 할 게 아무것도 없고 희망이 없었어요. 절망이 뭔지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는 게 절망이고,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서울대 행정대학원 시험을 봐서 석·박사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정보기관 고위 간부로 퇴직했다고 해서 대충 설렁설렁 학위를 딴 것도 아니었다.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우수논문상도 받았다. 이 8년의 세월 동안 그는 더 매사에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으로 단련됐다. 작은 일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는 점을 그와 같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해병대를 자원한 것도 고생과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삶의 태도가 엿보인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전 학년 수석, 중정 공채 5기 수석 입사 및 정규교육 수석 졸업, 영어교육 수석 졸업 기록은 성실성을 증명하는 객관적 지표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다니면서 하루 버스와 지하철을 열두 번 갈아타며 다닌 적도 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이게 내 운명이다 생각하니 다른 생각이 안 났어요.”

그는 새 정부의 국정원 개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혁은 필요하지만 대공(對共)수사 기능이 약화돼서는 안 된다는 게 지론이다. “대공수사는 오랜 기간 자료 축적이 돼야 하고 대부분 비밀 출처를 통해 수집한 정보입니다. 요즘 간첩 침투는 대부분 제3국을 경유하는데 법집행기관인 경찰은 타국에서 수사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보기관의 대공수사 기능을 약화하는 것은 이적행위나 다름없는 겁니다.”

교수로 인생 2막을 보내고 있는 그는 열정적 강의로 정평이 나 있다. 퇴임 이후 강단에 처음 섰을 때 강의를 잘하기 위해 강의 잘하는 교수의 강의 테이프 수십 개를 구해 듣고 강의 서적을 찾아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원조 교수 출신도 아니면서 성균관대에서 무려 7년 동안 국가전략대학원장을 지낸 비결이다.

4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많은 공작 임무를 성공시킨 비결을 물었다. “우선 치밀해야 하고 인간의 심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인간적 관계와 신뢰를 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남을 이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설득의 기술이 필요한데 설득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니즈(needs·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는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다. “절박하게 그것(목표)만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돼 있어요.” 그는 인터뷰 중간에도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청와대 근무 시절부터 사용해온 일본 제품이다. 잘 찢어지지 않고 비치지 않아 과거 일본 방문 시 많이 사뒀던 수첩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아침마다 기도로 하루를 연다. 1983년 시카고 근무 시절 폭설이 쏟아진 어느 날 밤 7세 아들이 갑자기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 계기였다. 종교가 없던 그였지만 ‘아들만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 이후 아들은 무사히 퇴원해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저녁으로 15분씩 기도를 합니다. 사정이 생겨 기도를 빠트리면 그 다음날에 못한 분량까지 합쳐서 합니다. 안 하면 벌받을까봐 무섭습니다.” 20년 넘게 같은 수첩을 쓰는 것과 아침, 저녁 15분 기도를 빠트리지 않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아직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통일문제, 북방정책, 정보심리학, 인간관계의 기술에 대해 책을 쓰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도 계속하고 싶어요. 절반 정도는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김민서 기자 spice7@segye.com

●염돈재는


△1943년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중앙정보부 공채 5기 수석 합격(1967년) △청와대 정책비서관(북방정책 담당) △국가안전기획부 국제1국 부국장 △주독일대사관 공사 △정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국가정보원 제1차장 △국정원 자문위원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건국대 초빙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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