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주독일 한국대사관 공사였던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한국 사회에 잘못 알려진 독일 통일 신화를 바로잡는 목소리를 내는 몇 안 되는 통독(統獨·독일통일) 전문가다.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 관료, 언론은 그간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정책을 통독의 일등공신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달 6일 독일 베를린의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이 바뀌어도 20여년간 지속한 서독 정부의 동방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건국대 초빙교수로 있는 염 전 차장과의 인터뷰는 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이 발표된 이후인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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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초빙교수로 근무 중인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지난달 25일 서울 광화문 시내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독일통일의 원동력과 국정원 근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원 기자 |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일 가운데는 노태우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에서 북방정책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북방정책을 입안하고 비밀교섭으로 1990년 한·소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 그의 대표작이다. 북방정책의 첫 번째 성과였던 한·헝가리 수교 작전, 즉 코드명 푸른다뉴브 작전에도 핵심 실무자로 참여했다. 한·중 탁구 국가대표인 안재형·자오즈민 선수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은 특별한 작전이었다. 한·중 수교 이전인 1989년 세계적인 탁구 스타 커플이 결혼에 골인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정보기관 역사에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는 정보기관 직원으로 청와대에서 비서관급으로 일한 첫 인물이다. 1995년 이사관을 끝으로 계급정년 퇴직을 한 이후 8년이 지난 2003년 노무현정부에서 해외담당 국정원 제1차장으로 복귀한 것도 그런 사례다. 그는 노태우정부 시절 실세였던 박철언 인맥으로 분류됐던 탓에 새로 들어선 김영삼정부에서 보직을 받지 못했다. 퇴직 직원이 고위직으로 복귀한 첫 사례였다. 이후 꽤 많은 퇴직 인사가 재기용됐다. “1차장 복귀는 운이 좋은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청와대에서 별도 통보가 없어서 언론 보도가 오보인 줄 알았죠. 퇴임하고 나니 할 게 아무것도 없고 희망이 없었어요. 절망이 뭔지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는 게 절망이고, 희망의 싹을 틔우기 위해 서울대 행정대학원 시험을 봐서 석·박사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는 새 정부의 국정원 개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혁은 필요하지만 대공(對共)수사 기능이 약화돼서는 안 된다는 게 지론이다. “대공수사는 오랜 기간 자료 축적이 돼야 하고 대부분 비밀 출처를 통해 수집한 정보입니다. 요즘 간첩 침투는 대부분 제3국을 경유하는데 법집행기관인 경찰은 타국에서 수사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보기관의 대공수사 기능을 약화하는 것은 이적행위나 다름없는 겁니다.”
교수로 인생 2막을 보내고 있는 그는 열정적 강의로 정평이 나 있다. 퇴임 이후 강단에 처음 섰을 때 강의를 잘하기 위해 강의 잘하는 교수의 강의 테이프 수십 개를 구해 듣고 강의 서적을 찾아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원조 교수 출신도 아니면서 성균관대에서 무려 7년 동안 국가전략대학원장을 지낸 비결이다.
4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많은 공작 임무를 성공시킨 비결을 물었다. “우선 치밀해야 하고 인간의 심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인간적 관계와 신뢰를 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목적 달성을 위해 남을 이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설득의 기술이 필요한데 설득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니즈(needs·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는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다. “절박하게 그것(목표)만 생각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돼 있어요.” 그는 인터뷰 중간에도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청와대 근무 시절부터 사용해온 일본 제품이다. 잘 찢어지지 않고 비치지 않아 과거 일본 방문 시 많이 사뒀던 수첩이라고 한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아침마다 기도로 하루를 연다. 1983년 시카고 근무 시절 폭설이 쏟아진 어느 날 밤 7세 아들이 갑자기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 계기였다. 종교가 없던 그였지만 ‘아들만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 이후 아들은 무사히 퇴원해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저녁으로 15분씩 기도를 합니다. 사정이 생겨 기도를 빠트리면 그 다음날에 못한 분량까지 합쳐서 합니다. 안 하면 벌받을까봐 무섭습니다.” 20년 넘게 같은 수첩을 쓰는 것과 아침, 저녁 15분 기도를 빠트리지 않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아직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통일문제, 북방정책, 정보심리학, 인간관계의 기술에 대해 책을 쓰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도 계속하고 싶어요. 절반 정도는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김민서 기자 spice7@segye.com

△1943년 강원도 강릉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중앙정보부 공채 5기 수석 합격(1967년) △청와대 정책비서관(북방정책 담당) △국가안전기획부 국제1국 부국장 △주독일대사관 공사 △정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국가정보원 제1차장 △국정원 자문위원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건국대 초빙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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