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달 14일 경기 안양 범계역 중앙분수대 앞에서 러시아 청년 데니스 베시마코브(27·왼쪽)가 세계여행 중 직접 촬영한 사진을 파는 가운데 이를 산 행인에게 메시지를 적어주고 있다. 데니스는 이렇게 판매한 돈으로 여행 경비를 충당한다고 전했다. |
지난달 14일 경기 안양 범계역 중앙분수대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 보니 한 외국인이 바닥에 앉아 사진을 팔고 있었다. 고대 유적으로 보이는 궁전부터 붉은 석양으로 가득 찬 초원, 트랙터 위에 술 취해 쓰러져 있는 외국인까지 별의별 광경을 담은 사진들을 바닥에 펼쳐놓은 채 추억을 공유할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 바닥에 놓인 흰 종이에는 귀여운 글씨로 ‘난, 세계를 여행해요! 제 여행을 응원해주세요. 가격은 원하시는 만큼♥’이라고 써져 있었다.
사진을 팔고 있는 데니스 베시마코브(27)는 러시아에서 온 여행객이다. 한달 전 한국에 왔고 지금까지 인도와 태국, 라오스, 베트남, 미국, 이집트 등 10여개국을 여행했다고 한다.
데니스 사진을 팔아 세계여행을 하는 중이다.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평소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여행하면서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며 "이렇게 해서라도 (다른)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보여주고 싶다”고 씩 웃어보였다.
![]() |
러시아 청년 데니스 베시마코브가 지난달 14일 경기 안양 범계역 중앙분수대 앞에서 팔고 있는 사진들. 데니스는 그간 세계 10여개국을 여행하면서 풍경과 사람, 유적 등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
파란 하늘 사진이 마음에 들어 하나 집어들자 데니스는 유성 펜을 들어 사진 뒤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Russia Yamal, Denis, Lifebigjourney, All the best Good Luck!'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사진을 구매하는 이들에게 사진을 찍은 장소와 자신의 이름, 날짜, 인스타그램 아이디, 전하고 싶은 기원 문구 등을 적어서 건넨다고 한다. 위 사진은 러시아 최북단 야말 반도에서 찍었으며, 인스타그램에서 'Lifebigjourney'라는 아이디를 찾으면 볼 수 있다는 게 데니스의 설명이다. 'All the best Good Luck!'을 통해 '최고의 행운을 빈다'는 따뜻한 기원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사진을 팔아 버는 돈으로 음식을 사먹고, 교통비를 융통하는 식으로 그는 세계여행을 하며 추억을 만들고 공유해왔다.
데니스는 2년 전만 하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현지 석유회사에 취업해 1년 정도 엔지니어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니 직장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았고 고심 끝에 회사를 그만뒀다. 이후 그는 직업도, 여자친구도, 돌볼 아이도 없는 몸으로 그때까지 모아둔 1000달러(한화 112만원 상당)를 들고 무작정 인도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끊고 세계일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데니스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여행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전했다.
![]() |
러시아 청년 데니스 베시마코브가 판매한 사진 뒤에 적은 글귀. 그는 찍은 장소와, 자신의 이름, 인스타그램 아이디,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적어 건넨다. |
그는 “여행을 하면서 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하는지, 인간관계는 어떻게 맺는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부모와는 어떤 관계인지 살펴본다”고 말했다.
그럼 한국은 어떠냐는 물음에 그는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며 "굉장히 좋은 사회기반시설이 갖춰져 있고 모든 곳이 그린 존이고, 공원이다"고 답했다. "살기 편해 한국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데니스는 한국인이 때때로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 여행 중에 비인간적인 기계문명의 횡포를 그린 올더스 헉슬리의 책 ‘멋진 신세계’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데니스는 서울과 경기 수원 등에서 10시간 동안 도시를 걸으며 행인들에게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들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70~80대쯤으로 보이는 노인 두명만이 함께 미소를 지어주었다는 게 그의 푸념이다.
데니스는 “한국인은 너무 자기 일에 바쁘고 휴대폰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나를 보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 |
러시아 청년 데니스 베시마코브는 행인들과 곧잘 함께 사진을 찍어준다. 데니스(맨 왼쪽)가 지난달 14일 경기 안양 범계역 중앙분수대 앞에서 기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데니스는 이렇게 전세계를 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있다. |
이어 “(그래도) 어떤 이는 매우 친절하고, 나를 도와줬다"며 "또 힘이 되어주고 싶어하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어했다”고 고마워 했다.
데니스는 아울러 “도움을 주고, 미소를 띠어주고, 멈춰 서 대화를 나눠준 모든 한국인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계여행을 꿈꾸는 한국인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남겼다.
첫번째는 정말 여행을 가고 싶다면 떠나라는 것이다.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실제로 데니스는 1년 동안 600달러(한화 67만원 상당)를 쓴 뒤 돈이 바닥나 나머지 7개월간은 사진을 팔아 벌면서 여행을 해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물론 쉽지 않고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돈 없이 여행하는 건) 가능하다”고 밝혔다.
두번째로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귀띔했다. 데니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전 세계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
그는 “여행을 하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라며 친구의 중요성을 연신 강조했다.
이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이는 도와줘라’, ‘인생을 즐겨라’, ‘다른 나라, 그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을 존중해라’ 등도 그가 깨알같이 알려준 조언이다.
![]() |
러시아 청년 데니스 베시마코브가 말레이시아 여행 중 찍은 사진. 출처=인스타그램 |
그는 여정에서 자신처럼 일을 그만두고 무일푼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이에 자신과 같은 미친(?) 여행 스타일이 몇 년 후에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상했다.
아래는 데니스가 한국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의 삶을 즐기세요.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든 상황에서 긍정적인 면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행복하든, 스트레스를 받는 힘든 상황이든 상관없습니다. 친구들이여, 행복하세요. 여러분 모두에게 행운을 빕니다.'
사진·글=안승진·배민영 기자 prod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