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있다는 애국열사릉은 북한에서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이어 제2국립묘지 같은 곳이다. 최승희의 묘지가 이곳에 조성된 것은 2003년 2월이다. 공개된 묘비 사진을 보면 ‘녀사’라는 호칭이 눈길을 끈다. 북한에서 녀사는 극존칭으로 쓰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최승희의 완전한 복권이 이뤄진 셈이다. 묘비의 사망 기록이 사실이라면 최승희 사후 무려 3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사망을 둘러싼 정확한 진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른바 6하 원칙 기준으로 살펴보면 ‘누가’를 제외하고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에 해당하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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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밝은 하늘 아래’를 공연 중인 최승희. 이 공연을 참관한 김일성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
최승희의 제자로 2003년 탈북한 북한 무용가 김영순이 기억하는 1967년 가을과 시기가 비슷하다. 남한에 정착한 이후 김영순은 최승희 관련 여러 가지 증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의 발언 내용이 우리에게도 주목을 끌었던 것은 발언 정황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2011년 11월 30일 자유아시아방송(RFA) 대담에서 밝힌 김영순의 최승희 관련 증언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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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인민배우 최승희의 무용생활 30주년 기념회에서 최승희가 참석자와 악수하고 있다. |
최승희의 구체적인 사망 경위를 두고 김영순은 ‘정치범수용소에 갔던 재일 북송교포의 말’이라면서 “최승희가 어느 광산에서 데모하다가 총살당했다는 소리도 있다”는 증언을 했다. 2010년 10월 사망한 최고위 탈북 인사 황장엽도 유사한 증언을 한 적이 있다. 1998년 8월 아리랑TV 최승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숙청 이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병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승희가 57세 때, 곧 1967년 가을에 일어난 숙청 사건에 대해 김영순이 남긴 현장 목격담은 더 생생하다. 그 즈음 북한 무용계에서는 심각한 사상투쟁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 김창만이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인민군협주단과 국립무용극장 소속 무용가 50여명을 긴급 소집했다. 당시 최승희는 김창만과 함께 단상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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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전성기 시절인 1950년대 최승희. 최승희는 1955년에 북한의 인민배우가 됐다. |
그에 앞서 북한은 그해 6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4기 16차 대회에서 중대한 결의를 한 가지 한다.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결의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김일성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배자로 떠받들자는 것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당종파분자’로 분류하고, 이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 작업의 총지휘자가 당시 북한에서 ‘당 중앙’으로 불리던 김정일이었다. 앞서 언급한 무용계의 사상투쟁도 그 일환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창만은 최승희를 향해 직접 공박(攻駁)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제물로 삼았다. “‘사도성의 이야기’에서 ‘왜 중(스님)을 많이 등장시켰는가’”라고 힐문했다. 1954년 11월에 초연한 작품을 이때 다시 비판한 데는 의도성이 다분히 엿보였다. ‘사도성의 이야기’에 여러 스님들이 염주를 굴리면서 성을 한 바퀴 도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를 새삼스럽게 문제 삼았다. 이후 최승희는 무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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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그 직전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 이일경이 “자본주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등의 ‘최승희의 과오’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일경이 라이벌 관계였던 안막을 끌어내리기 위한 외곽 때리기 수법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최승희가 안막과 함께 숙청당했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최승희가 그 이후로 한동안 고초를 겪은 것은 틀림없다. 1958년 10월 김일성이 예술인 집회에서 최승희를 공개 비판한 것이 결정타였다.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질을 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부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기만 잘난 체하면서 내세우던 나머지 마치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김일성이 지목한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이 바로 최승희였다. 이 즈음 최승희는 무용가동맹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국립 최승희무용연구소도 평양음악무용대학 무용학부로 개편되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최승희 숙청설이 나돈 것이다. 김일성으로부터 이만한 비판을 받았다면 북한에서는 당연히 숙청감이긴 했다. 그런데 최승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최승희의 제자이자 나중에 평양음악무용대학 안무강좌장을 역임한 김락영은 당시 최승희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때 최 선생은 무용학교의 평 안무가로 있었는데 그것도 오랜 기간은 아니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무용가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2003년 보도한 “애국열사릉에 돌아온 최승희, 1967년 최승희는 왜 사라졌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밝힌 내용이다.
최승희의 최후와 관련해 조총련계 재일동포 무용가인 리미남의 증언도 주목할 만하다. 리미남은 2003년 4월 25일부터 5월 8일까지 평양에 머물면서 최승희의 북한에서 행적을 추적했던 인물이다.
“확실한 것은 1967년까지는 북의 잡지인 조선예술에 그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고, 최승희 선생과 그의 딸인 안성희 선생이 쓴 작품의 논평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확실히 1967년까지는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미남은 2003년 방북했을 때 최승희의 친정 조카 최로사와 최효섭도 만났다. 바로 오빠 최승일과 석금성 사이에 낳은 딸과 아들이었다. 리미남이 전한 바에 따르면 두 조카는 1995년 5월 1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접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고모 최승희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김 위원장은 ‘(최승희에 대한) 조사를 해보니 무죄여서 복권되고 묘에 안치된 것’이라고 말했다.”
리미남은 김정일이 말했다는 최승희 묘의 애국열사릉 이장 경위도 두 조카로부터 전해 들었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날짜는 정확하지 않으나 2002년 11월 27일에 방침을 받아 2003년 2월 11일에 발표가 되고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것이다.”
최승희가 애국열사릉에서 영면에 든 2003년 2월 그의 묘지 앞에서 추모 모임이 열렸다. 북한에서 유명한 시인이자 작사가로 활동하는 조카 최로사가 추모사를 하면서 ‘하늘을 찌르는 듯한 힘찬 목소리’로 고모 최승희에게 외쳤다고 한다.
“고모여, 최승희여! 이제는 땅을 차고 일어나라!”
나 역시 지금이라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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