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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짜릿한 창작의 쾌감

입력 : 2017-04-18 21:20:30 수정 : 2017-04-18 21: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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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으로 직접 물건 만드는 ‘메이커스 열풍’ / 기성품보다 돈·시간·에너지 더 들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 만드는 재미 / 3D프린터·목공예 등 ‘제조수업’ 인기 / ‘생산자+소비자’ 프로슈머의 한 형태 / 소유보다 제작과정 자체에 의의 둬
4월 둘째주 목요일 오후 7시. 상인들이 퇴근하고 인적이 끊긴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 불이 켜지고 직장인, 학생, 주부 등 다양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소는 550호, ‘팹랩서울’이다.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지역에 밤늦은 시간 이들이 방문한 것은 고작 컵받침을 만들기 위해서다. 최첨단 레이저커터 강의를 3시간 동안 받은 후 이들의 손에는 직사각형, 삼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컵받침이 쥐어졌다. 상형문자 모양의 상식을 깨는 컵받침도 등장했다.

할인점에서 1000원이면 간단하게 살 수 있는데, 이들은 이 수업에 3만5000원을 들였다. 퇴근 후 휴식이 필요한 시간에 이들은 왜 굳이 비싼 돈과 에너지를 들여 컵받침 만들기에 나섰을까.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던, 나에게 맞는 제품을, 땀을 흘리며 직접,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건으로 탄생시키기’ 위해서다. 이른바 ‘메이커스(Makers)’ 열풍이다.

과거에는 이런 사람들이 경제관념 없고 시간이라는 자원배분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덕후’(오타쿠)나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창하게는 4차산업혁명 시대, 생산의 파편화와 유통·소비의 재연결이라는 키워드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한다. “장인(匠人)이 별건가. ‘한땀 한땀’ 정성들여 작품을 만들어내는 모든 사람이 장인이다”라고. 


충남 홍성의 홍주성역사관 ‘12평 작은 도서관’은 메이커스운동의 공공성에 힘입어 기둥을 둘러싼 책꽂이와 벽을 가리지 않는 책꽂이로 재탄생하면서 이용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생태도시재생연구소 제공
◆“불필요한 물건이 어딨어? 난 뭐든 만든다”


팹랩서울은 요일별로 오후 7∼10시 3D프린터, 레이저커터, CNC라우터 수업을 진행한다. 최첨단 기계를 이용한 ‘제조수업’에 20명의 정원이 꽉 찬다. ‘제작(fabrication)’과 ‘실험실(laboratory)’의 합성어인 팹랩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미디어랩에서 처음 탄생한 이후 전 세계에 1000여개가 만들어졌다. 창업 초기 기업들이 싼 비용으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최근에는 손쉽게 자신의 물건을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일반 직장인이다. 직업이나 경제활동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구상한 작품을 직접 만든다는 제작행위 자체에 의의를 둔 활동이다. 따라서 원목의자, 정리함, 실내조명, 헤드폰 등 실용품 외에도 아이언맨·피카츄 미니어처 등 철저히 개인의 취향을 담은 오타쿠적인 물건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된다. 

“직접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아 3D프린터와 레이저커팅 수업까지 다 들었다”는 한혜연(45·여·사서)씨는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지만 하나 만들고 난 다음의 성취감이 커 점점 더 큰 것에 도전하게 된다”고 말했다.

팹랩서울이 만들어진 2013년에만 해도 3∼4곳에 불과하던 이런 공간은 현재 전국에 80여곳이 있다. 경기 수원에 위치한 ‘셀프제작소’는 2013년 2400여명이던 이용객이 지난해 5000여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팹랩서울의 남진혁 연구원은 “대학생 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가족이 다함께 카드지갑을 만드는가 하면, 40대 아버지가 10대 중학생과 함께 초급과정부터 차근차근 함께 배워 고급단계까지 가는 등 메이커스 바람이 성별과 연령, 전공을 초월하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에 꼭 최첨단 기계가 개입해야 하는 건 아니다. 못질, 톱질, 사포질 등 전통적인 제조방식에서도 ‘나만의 것’을 만드는 행위는 이어진다. 목공예, 가죽공예, 비즈공예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가르치는 소규모 공방들이 서울 이태원, 홍대, 마포 등지에 골목마다 들어서고 있다. 

◆“생산과정에 몰입하며 느끼는 성취감의 가치”


신촌 인근의 한 공방에서 목공예를 배우는 류모(38·회사원)씨는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던 생활소품을 직접 구현하는 재미가 있고 무엇보다 만드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며 “열심히 몰입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톱질을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메이커스’ 열풍은 아파트 일색의 서울보다 마당이 있는 주택이 대다수인 지방에서 더 거세다. 평상과 나무그네, 화단 등 제조 물품의 확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안전과 수납공간을 고려한 2층침대 계단 겸 수납장.
갓골목공소 제공
충남 홍성 ‘갓골목공소’에는 10년 새 목공일을 배우고 싶다고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2007년 홍성 유일의 목공소였지만 지금은 곳곳에 비슷한 목공소가 생겨났다. 교육생들은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하다. 70대 어르신은 이곳에서 목공일을 배우고 난 뒤 자신이 쓸 물건들을 만드는 작업실을 차리기도 했다.

방인성 소장은 “직접 만들면 돈이 더 많이 들기도 한다. 경제적인 목적이라면 차라리 공장에서 만들어진 가구를 사라고 조언도 하지만 직접 만들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며 “창조, 창작의 쾌감과 직접 만들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결합한 것 같다”고 최근의 메이커스 열풍을 설명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기성가구보다 자신만의 맞춤형 가구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들에게 제작의 목적은 소유가 아닌 과정이다. 머릿속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 의의가 있으니 작품도 ‘무소유’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메이커스’ 운동은 버려진 공간과 공공시설 재생이라는 통로로 연결된다. 획일화된 디자인의 공공기관에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 대신 시설물이나 구조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을 구상해 공간에 활력을 부여하는 형식이다. 

피카츄 미니어처.
가뜩이나 좁은 박물관에 둥근기둥이 툭 튀어나와 있다면? 기존에는 버려지는 공간이었겠지만 ‘메이커스 사회’에서는 원형기둥을 둥글게 감싸는 책장이라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직접 만들어서 해결이 가능하다.

공공기관 실내디자인 관련 프로젝트 전문가인 이창섭 박사(생태도시재생연구소 소장)는 “버려진 공간에 기성품이 아닌 이용자와 관리자의 의견을 반영한 디자인 가구를 설치해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 보니 만족도와 활용도가 상당히 높았다”며 “공간의 특성을 파악해 해당 공간만을 위한 디자인을 했을 경우 작은 소품 하나로도 공간을 효율적이고 창의적으로 탈바꿈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메이커스운동은 생산적인 소비자라는 프로슈머(Producer+Consumer)의 다른 말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2017년을 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만든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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