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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 건축가들이 지은 건축물은 일제의 잔재로 여겨지며 저평가되어 왔다. 사진은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 |
지금의 서울 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자리에 1916년 세워진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의 건축가들을 탄생시킨 요람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제의 통치에 강렬히 저항하면서도, 미쓰코시 백화점 앞에 서면 근대 문물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느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근대 건축물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요동쳤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부에는 근대 건축의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일제의 잔재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한다. 일제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을 우리의 근대 유산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 건축물이 식민지 시대의 잔재로 여겨지면서, 당대 조선인 건축가들의 업적은 저평가되고 있다. 중국 칭다오이공대 건축학과 교수를 지낸 김소연 아키멘터리 대표는 책 ‘경성의 건축가들’을 통해 조선의 근대 건축물을 만들었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당시 건축계의 비주류였던 조선인 건축가들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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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전경. |
당시 일본인이 주류였던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다. 조선인들은 이곳을 졸업한 후에도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게다가 당시 조선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에 대한 관념이 남아 있어 조선인 건축가의 운신은 폭이 좁았다. 조선인 건축가가 경성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민족자본가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조선인 건축가가 설계한 백화점과 주택,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시기 등장한 조선인 최초의 근대건축가는 박길룡이다. 그에게는 ‘최초’와 ‘최고’,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박길룡은 1919년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 신축공사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1937년에는 지금의 서울 종각 사거리에 세워진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다.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화신백화점은 묵직한 모양새의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화신백화점은 경성 인구의 80%가 구경했고, “아침에 들어가면 해가 져서야 나온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박길룡은 일제 치하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우리말로 된 최초의 건축 월간지를 창간하고 ‘조선어 건축 용어집’ 발행을 시도하는 등 차별받았던 조선인 건축가를 포용하는 업적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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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공업전문학교 부지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 역사기록관. |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인 박동진은 졸업을 앞두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1919년 3월1일의 일이었다. 그는 독립만세를 외치고 가두행진을 하며 3·1운동에 앞장섰다. 박동진이 3·1운동에 가담한 대가는 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 그는 5년이 지나서야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양 건축에 관심을 가진 그는 보성전문학교의 건축주 김성수를 만나 학교 건물을 설계했다. 지금의 고려대 도서관 건물이다. 1937년 도서관 설계 당시 민족의식을 운운하는 그에게 김성수가 “기술자가 도면이나 그리지, 무슨 인생관이냐”고 면박을 주자, 박동진은 “기술자에게도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다”고 받아쳐 사과를 받아냈다.
이처럼 조선인 건축가들의 건축 업적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간극을 마주했다. 건축이라는 이상과 식민지 시대라는 암울한 현실이다. 당시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나온 조선인 건축가 대부분은 총독부나 경성부청에 취업해 일제의 관청을 지었다. 관청들은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위한 건물이었다. 이에 저자는 “당시 건축가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식민지라는 현실을 마주했다”고 반박한다. 당시 조선인 건축가 중에는 항일운동을 위해 건축을 내려놓은 이도 있었고, 일제를 극복하기 위한 건축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삶과 이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이들을 통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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