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는 중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로 활용했다. 중국 문화부와 중화전국문학예술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공연이었다. 조선예술단은 이 공연에서 ‘북춤’ ‘화관무’ ‘농악무’ 등의 소품과 함께 무용극 ‘반야월성곡’ ‘춘향전’과 같은 대작도 함께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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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희의 ‘집시춤’(왼쪽)과 ‘청조무(파랑새춤)’. |
이 예술단 무용팀에는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연구반 1~2기 출신을 중심으로 모두 25명이 포함됐다. 안성희는 물론 안제승·김백봉 부부도 무용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방소 예술단 단장은 당시 문화선전상 허정숙이었다. 무용팀은 그해 3월 북한 무용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한 최승희가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소련에서 공연은 1부는 음악, 2부는 무용을 공연하는 형식이었다. 공연 작품은 무용극 ‘춘향전’ ‘해방의 노래’, 2인무 ‘목동과 처녀’ ‘우크라이나의 춤’ ‘추석 전날’ ‘농촌 풍경’ 등이었다. 최승희는 ‘석굴암의 보살’ ‘초립동’ ‘경복궁타령’ ‘장구춤’ ‘부채춤’ ‘노사공’ 등의 작품에서 독무를 선보였다. 안성희는 ‘북춤’ ‘검무’ 등에 출연했다. 최승희의 무용 공연에 대한 소련 언론의 평가는 찬사 일색이었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공연평이 대표적이다.
“조선무용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만 그 표현은 아주 절제되어 있다. 우리는 무용극장 배우들의 재능과 그들의 천재적인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며 배우, 작가와 안무가인 최승희를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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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은 최승희 가족이 북한에서 최고 전성기를 누린 해였다. 2년 후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이 ‘종파분자’ 혐의로 숙청됐다. 닥쳐올 운명을 알지 못한 최승희 가족이 1956년 평양에서 단란하게 사진을 찍고 있다. 가운데 여성이 최승희 부부의 딸 안성희다. |
선무공작대는 북한 체제 선전과 인민군 위문이 주목적이었다. 안성희도 무용단의 일원으로 그 공작대에 참여했다. 안성희의 둘째 외삼촌 최승오도 관리자로 동행했다. 최승희는 건강 문제로 공작대에서 빠졌다. 선무공작대를 따라 서울로 내려온 안성희 일행은 시공관(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두 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9월 3일 지방 전선으로 인민군 위문공연을 위해 서울을 떠난다. 안성희는 최승오, 임정옥, 전화 등과 함께 제3조로 편성되었다. 3조는 광주·목포 방면이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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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최승희는 남으로 내려가는 딸에게 “한영숙의 춤을 배우고, 가능하면 북한으로 모셔 오라”는 어려운 숙제를 내준다. 한영숙은 우리 민속춤 대가인 한성준의 손녀로 할아버지 사후 이 분야에서는 첫손에 꼽히는 무용가였다. 한영숙을 만나기 위해 안성희는 가족과 같은 김민자를 앞장세운 것이다. 그러나 안성희는 한영숙의 거절로 어머니가 준 임무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서울에서 김민자, 한영숙을 만난 안성희가 당시 왜 큰아버지 안보승을 만나지 못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안성희가 마음만 먹으면 큰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주변의 눈이 무섭거나 또는 후환이 두려워 서로 만나기를 꺼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보승은 서울에 내려온 조카 안성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안보승이 1988년 8월에 펴낸 자서전에서다.
“조카딸 승자(성희의 다른 이름)가 예술단의 일원으로 내려와 부민관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외면해 버렸고, 동대문시장에서 넝마장사로 소일하고 있을 즈음 승자 일행이 시장 구경 나왔다고 떠들썩했지만 나는 모르는 체 지나치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어쩌다 세상 꼴이 이 모양이 됐나 싶어 번민도 많이 했다.”
남한에 파견된 안성희는 전쟁 와중에서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해지면서 안성희 일행은 대전에서 북행길이 막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성희는 갑자기 학질에 걸린 데다 발까지 부르터 도저히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 즈음 소재 파악이 안 되는 안성희의 행방불명 소식이 지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북한 ‘노동신문’에는 심지어 안성희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최승희는 딸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안막의 권유로 1950년 11월 급히 베이징으로 피신한다. 안성희가 외삼촌 최승오와 함께 걸어서 목숨만 부지한 채 겨우 평양으로 귀환한 것은 그해 말이었다. 그리고 안성희가 아버지와 같이 베이징에서 어머니와 다시 상봉한 때는 1951년 3월쯤이었다.
그런 안성희가 무용가로서 다시 공연에 나선 것은 1951년 5월 베이징에서였다. 최승희가 무도연구반을 개설해 중국인 제자 등을 가르치고 있던 중앙희극학원 전용소극장에서 열린 학생들의 공연 무대였다. 어머니와 함께 공연한 이 무대에서 안성희는 ‘무지개춤’ ‘동심’ 등의 작품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이어 안성희는 그해 5월 동독 동베를린에서 열린 제 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해 ‘장검무’로 금상을 수상해 다시 한 번 무용 재능을 빛냈다. 그리고 6·25전쟁이 소강 상태였던 1952년 9월 어머니, 동생 병건과 함께 중국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안성희는 1953년 9월 꿈에 그리던 소련으로 유학을 떠난다. 볼쇼이발레학교에서 주로 발레를 공부하고, 스페인 무용도 익혔다. 소련 유학 중이던 1956년 2월 28일 안성희는 국제무용 콩쿠르에 참가해 ‘집시춤’으로 또다시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해 6월에 안성희는 유학 과정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안성희는 모란봉극장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김일성도 직접 관람한 이 공연에서 안성희는 자신이 안무한 10여개 작품을 북한에서 공연했다. 어머니가 대본을 쓰고 안성희가 안무를 맡은 무용극 ‘옥란지의 전설’도 그중 하나였다. 이날 공연에서 관중들로부터 가장 박수를 많이 받은 작품은 역시 ‘집시춤’이었다. 김일성이 무대에 올라 안성희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겼다는 바로 그 공연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그 장면에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는 여러 사람의 목격담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안성희가 북한에서 영예롭게 여기는 공훈배우가 된 것도 그 공연 후였다. 그에 앞서 그해 1월에는 안막이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승진했다. 최승희 가족으로서는 그해가 북한에서 최고 전성기에 해당한다.
안막이 ‘종파분자’ 혐의로 숙청된 것은 1958년 8월의 일이었다. 그 영향으로 최승희도 북한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면서 무용가로서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런 최승희를 대신해 북한 당국에서는 안성희를 대표 무용가로 앞세우는 정책을 의도적으로 펼쳤다. 북한 당국은 심지어 안성희로 하여금 아버지 안막과 어머니 최승희의 사상성과 작품 경향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도록 종용했다는 이야기도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 정확한 경위와 배경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안성희는 인민배우를 거쳐 1963년에는 평양무용극원 원장에 취임한다. 안성희 나이 31살 때였다. 어머니 최승희 이상으로 북한에서 출세 가도를 달린 것이다.
그러나 안성희의 이름도 1967년을 전후해 북한에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았던 운명을 딸도 똑같이 맞이한 것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은 안성희를 포함해 최승희 일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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