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10년 전만 해도 '여성의 결혼=퇴사‘라는 공식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됐다. 여성 칼럼니스트 메구미씨는 "당시 여성이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고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단언했다.
'일이면 일, 육아면 육아' 둘 중 하나만 선택을 강요받던 시대가 지나고, 여성의 인권이 가파르게 상승한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로 사회에서 승승장구하던 여성이 결혼, 특히 출산 후 사회에 복귀하지 못한 채 아줌마로 늙어간다.
결혼 퇴직이 건재한 사회 분위기도 이유겠지만, 성별에 따라 역할이 정해져있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힘든 현실과 성차별, 육아 문제 등이 여성을 집안에 잡아두는 요인으로 손에 꼽힌다.
지난해 한 워킹맘의 절규가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다.
보육원 추첨에 떨어져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진 한 30대 맞벌이 주부가 인터넷에 올린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라는 제목의 글이 화제가 됐었는데, 일본 기혼여성이 처한 팍팍한 현실을 대변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보육원 입학문제는 관련 조사를 시작한 1995년 이전에도 비판을 받았지만, 1990년대 초 버블이 꺼진 뒤 홑벌이로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맞벌이 가정이 부쩍 늘어난 여파로 함께 수면 위로 본격 떠올랐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으로 보육원 입학을 기다리는 아동은 2만3553명으로 2년 연속 증가하는 추세이했다. 대기 아동의 분류가 지방자치단체마다 달라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수를 더하면 무려 7만7000여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일본뉴스네트워크(JNN)가 지난 1일 수도권 인가 보육소를 대상으로 희망자와 입소 현황을 조사한 결과 27개 지자체에서 집계된 신청자는 후생노동성 조사를 크게 웃도는 9만7800명으로 작년보다 8%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입소 여부를 응답한 20개 지자체로 대상을 좁히면 신청자 7만9937명 중 입소가 결정된 아동은 5만 3086명에 그쳤다. 입소율을 66%로, 신청자 3명 중 1명은 갈곳을 찾지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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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보육원 입소 여부는 해마다 2월 말~3월 초 신청자 가정에 통보된다. 보육원의 부족 문제를 다룬 현지 방송 프로그램을 캡처했다. 이 방송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 사진=JNN 방송화면 캡처 |
지난 3일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보육원 수요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지만, 설립이 계획된 예정지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아이들 소리에 시끄럽다'는 이유를 들어 막아서 잇따라 무산됐다. 또 정부 외면 등으로 열악한 처우에 놓인 보육교사의 인력난까지 일고 있다.
■ "퇴사뿐이 답 없다"
그동안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보육원 문제가 소셜미디어(SNS) 등에서 폭발적으로 불거져 나오자 일본 정부는 올해 말까지 '대기아동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방침을 뒤늦게 세웠다.
이마저도 지난달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참석한 아베 신조 총리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지속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목표의 연내 달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임에 따라 물거품이 될 형편에 놓였다. 예산도 문제지만 해결해야 할 다른 과제가 산재한 것 역시 목표 달성을 요원케 한다. 현지 언론은 '당분간 문제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보육원을 신설해도 모자를 판에 비관적인 소식이 잇따르자 지난 7일 도쿄 가스미가세키 중의원 회관에는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지 못한 보호자 100여명이 모여 정치인을 상대로 실상을 토로했다. 한 여성은 이 자리에서 "지난해 보육원 문제가 논란이 돼 올해는 개선될 것을 기대했지만 상황은 변한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SNS에는 젊은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보육원 합격 통지서를 사진에 담아 올리는 행위가 유행하는 한편 떨어진 부모의 비통한 목소리도 온라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보육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글이 올해 인기라고 전했다.
워킹맘들 사이에서 자녀의 보육원 합격 통지서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지금 입소 전쟁에서 패배한 여성은 "퇴사 외엔 답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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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보육원 입학허가서 사진. 이 통지서가 SNS 등에 게재되면 다른 어머니들의 축하 메시지가 이어진다. 사진=SNS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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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육원에 자녀를 입학시키고 싶다'고 적힌 팻말을 들어 보이는 일본 여성들의 모습. 이들은 임시 단체를 만들며 정치인을 상대로 보육원 부족 사태의 실상을 알렸다. 사진=산케이신문 캡처 |
성차별 역시 일본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 기제로 작용한다.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의 야스토미 아유무(52) 교수는 일본은 선진국 중에서 놀라울 정도로 남녀차별이 뿌리 깊은 사회라고 지적한다. 실재 세계 144개국의 남녀평등 정도를 지수화한 세계경제포럼(WEF)의 '성별 격차 지수'를 보면 일본은 111위로 하위권에 속한다. 한국은 그보다 더 아래인 116위다.
야스토미 교수는 얼마 전 도쿄대가 여학생 비율을 늘리겠다며 임대료 보조 제도를 시작했지만 '단순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이 도쿄대 진학을 꺼리는 이유와 관련, "대학을 졸업해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남성과 경쟁이 안 되니 지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어 "처음에는 남성과 동일선상에서 경쟁하지만 여성의 앞날에는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하고, 일정한 자리에 오르면 그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도 상장 대기업의 여성 임원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고, 도쿄대를 놓고 보더라도 여성교수의 비율은 단 6%에 그친다"고 지적한다.
6%라는 수치는 그나마 여성의 인권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결과물로, 2000년에는 1%에 그쳤다.
야스토미 교수는 "도쿄대의 여성 교수 비율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문대와 비교해 절망적인 숫자"라며 "현실을 직시한 여성이 일찌감치 꿈을 접고 결혼시장이 선호하는 대학에 진학한 뒤 여성스러운 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복지단체가 르완다에 생리대를 보내는 건 칭찬 받아야 할 일이지만, 세계에서 5번째로 성차별이 적은 르완다로부터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여성을 상대로도 조언을 잊지 않았다
.
"이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과 지식이 아닌 감성에 있다. 지식과 기술은 배우면 비슷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감성은 배워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이 '땅따먹기(부동산투기)'와 '숙박 근로(퇴근하지 않고 회사에서 머물며 근무)'하면서 돈 버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앞으로는 창조적인 활동이 사회를 이끌어 나간다. 여기에 맞는 이들이 바로 여성이다. 여성은 풍부한 감성을 갖춘 이가 많다. 또 남성이 만든 사회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믿고 경쟁에 두려워하지 않을 때 일본은 쇠퇴를 벗어나면서 성별 격차도 함께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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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토미 아유무 교수는 지난 7일 아사히신문을 통해 여성차별 문제를 지적했다. 사진=아사히신문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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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토우치 자쿠초 스님은 지난 5일 아사히신문을 통해 여성라고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사진=아사히신문 캡처) |
한편 30여년간 수도 생활을 한 승려이자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95)는 아래와 같이 조언했다.
"사람은 서로 부족함을 채우고 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여자라서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은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기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남성 중심 사회였던 일본이 전후 빈곤을 겪으며 남자는 대학을 나와 사회에서 활약해야 한다고 당연스레 여겼지만, 여성은 시집가면 그만이니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견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성장으로 여성도 공부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여성도 노력하면 남성과 대등하게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건 과거 부모의 훈육방법이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 여러 가능성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산다는 건 내 안에 있는 가능성에 비료를 주고 마음껏 큰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가능성을 찾는 법을 모른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좋고 싫은 게 있다.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내일 인생이 끝나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언젠가 꽃을 피울 수 있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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