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독한 열정' 가진 문하생만 생존… 하루 20시간씩 맹연습

입력 : 2017-01-27 03:00:00 수정 : 2017-01-26 19:56:11

인쇄 메일 url 공유 - +

〈10〉 제자들이 말하는 스승
1933년 2월 최승희가 2차 도일을 위해 도쿄역에 도착했을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마중 나온 남편 안막은 최승희에게 이시이 바쿠로부터 “생활비를 전수히 책임지겠다는 말은 없었다”고 전한다. 최승희가 일본으로 건너올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안막이 편지로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이는 최승희 부부와 딸, 제자 김민자까지 당장 4식구의 생계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다행히 이시이 바쿠는 ‘유치원 아해’들의 무용 연습을 최승희에게 맡기고 그 수입을 모두 가져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수입이 당시 매월 30원이었다. 여기에 고향에서 부쳐온 안막의 학비 30원을 합친 60원이 4식구 한 달 생활비의 전부였다. 다행히 4년 전과 달리 최승희를 알아보는 일본 팬들이 훨씬 늘어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승희는 “2년 동안을 경제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한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의 무용을 지지하는 팬을 기르기에 힘썼다”고 한다. 최승희가 일본에서 개인 무용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1935년 5월이었다.


명칭은 경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승희무용연구소’였다. 때마침 최승희가 도쿄 고지마치구(麴町區) 구단사카(九段坂)에 있는 다이쇼(大正) 빌딩에 새로 집을 마련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3층이 연구소였다. 최승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기나미구(杉竝區) 에이후쿠초(永福町)로 이사한다. 500평가량의 넓은 땅에 당시 유행하던 ‘모던 주택’을 새로 지어서였다. 1936년 10월에는 연구소도 아예 이 집으로 옮겼다.

일본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동안 최승희의 살림 형편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우선 1935년에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반도의 무희’가 4년 장기 상영을 할 만큼 흥행을 거두면서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승희는 그 즈음에 일본에서 인기 광고 모델로도 활동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아사히그래프’ ‘선데이메일’ 등의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학용품·약품·화장품·과자류 등 모델을 한 상품도 다양해 당시 최승희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그해 10월에 정식으로 만들어진 후원회도 큰 도움이 되었다. 후원회원 중에 조선과 일본의 당대 명사들이 많았다. 조선의 여운형,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특히 그중 한 명인 일본 잡지 카이조샤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는 영화 ‘반도의 무희’ 출연을 주선하는 등 여러모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기 최승희의 한국인 제자가 김백봉이다. 김백봉은 1941년 6월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김백봉의 초창기 체험담에서 최승희의 독특한 제자 교육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선생님(최승희)이 무용을 거의 가르쳐 주지 않았다. 2층 연습장 위 다락방에 몰래 숨어 열쇠구멍을 통해 연습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흉내를 내는 식이었다.”


1943년 10월 극장 분장실에 함께 모인 최승희와 제자들. 뒷줄 왼쪽 시계방향부터 이석예, 장추화, 하리타 요코, 최승희, 김백봉.
최승희의 제자들은 입문 초기 1년 정도는 무용과 관계 없는 일, 곧 청소나 빨래, 부엌일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는 제자들도 많았다. 최승희도 이런 제자를 무용에 대한 열정이 없는 ‘탈락자’로 여겨 굳이 붙잡지 않았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일반적이던 도제 교육 방식 그대로였다. 김백봉의 증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느 날 불쑥 제자를 불러내 ‘저 언니가 하던 것 해봐’라는 식으로 테스트를 했다. 그때 선생님 눈에 들어야 본격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10시간은 보통이고 어떤 날은 밤을 새워 20시간도 가르쳤다.”

당시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얼마나 엄했던지 김백봉은 지금도 최승희를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사적으로는 ‘형님’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러본 것은 평생 동안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 단원들이 ‘부채춤’(왼쪽)과 ‘장미춤’을 추고 있다. 북한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다.
김백봉은 1942년 12월에 ‘궁녀무’로 대망의 첫 무대에 선다. 최승희의 제자가 된 후 1년 6개월 만이었다. 보통 최승희의 제자들이 3년 정도 연습을 거친 후 데뷔했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빠른 편이었다. 그것도 최승희가 세계 무용 사상 최초로 24회 연속 독무공연 기록을 세웠던 도쿄 데이코쿠(帝國)극장 공연 무대에서였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연구생들이 채 1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최승희는 1944년 3월 중국으로 본거지를 옮길 때까지 9년 가까이 일본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중 조선인 장추화, 이석예, 일본인 하리타 요코(針田陽子)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김백봉을 포함한 이들 4명은 최승희가 1943년 8월 중국 공연을 떠날 때 대동한 제자들이다. 이들 4명과 함께 최승희는 그해 10월 상하이 메이치(美琪)극장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역사적인 중국 공식 데뷔 공연을 가졌다. 공연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연 도중에 중국의 대표적인 경극 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을 만난 것은 ‘동양 발레’ 부흥의 꿈을 가졌던 최승희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최승희가 중국에서 처음 제자들을 받아들인 것은 1944년 말 베이징에서였다. 최승희는 이에 앞서 그해 3월에 말기로 접어든 태평양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건너와 있던 참이었다. ‘구양서정(歐陽抒情)’이란 극단 산하에 ‘최승희무용 단기훈련반’을 설치하고, 조선무용과 일반무용을 가르쳤다. 1945년 3월에는 베이징 싼쭤대로에 집을 마련하고,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를 열었다.

광복 후 월북한 최승희는 6·25 전쟁 도중인 1951년 11월 일행 10여명과 함께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피신하게 된다. 북한 주석 김일성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배려로 이듬 해 3월 중앙희극학원 안에 ‘최승희무도연구반’을 개설한다. 이 연구반은 정원이 100명을 넘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최승희가 이때 길러낸 제자들이 나중에 중국 무용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당시 중국인 제자 중에 어우양리(歐陽莉)가 있었다. 1951년 ‘최승희무도연구반’ 시절 제자였던 그는 2010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어우양리는 당시 스승 최승희에 대해 “음악·의상·조명 등 무용 예술의 모든 것을 섭렵한 대가였다. 무용을 창작하고, 공연하고, 가르치는 데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제자 중 한 명이던 중국 네이멍구성의 스친타를하는 최승희와 첫 만남을 ‘천당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최승희가 가르친 과목은 발레, 신흥무, 남방무, 중국 무용 등으로 다채로웠다. 그는 무용 기교뿐 아니라 “최승희 선생의 무용이론, 창작 사상, 민족 무용에 대한 집념, 무용예술에 대한 헌신”을 배웠다. 그는 “나의 전 생애를 좌우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최승희가 1946년 7월에 월북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월북 한 달 보름여 만에 초고속으로 평양에 ‘국립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소했다. 일제 때 요정이었던 대동강변 3층짜리 동일관 건물에서였다. 냉면으로 유명한 지금의 옥류관 자리에 있었다. 이 연구소는 김일성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아 정원 30명의 3년제로 운영됐다. 이 연구소는 1953년에 ‘국립최승희무용학교’로 승격된다. 이때 재학생 숫자는 800여명에 달했다. 1958년 8월 안막의 숙청과 함께 최승희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10월 최승희무용학교의 운명 또한 국립예술대학 무용학부로 격하되고 만다.

북한에서 최승희의 활동은 한국에 아직까지 극히 제한적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제자 양성에 관한 기록도 아주 단편적이다. 2010년에 한 신문에 최승희의 평양 시절 제자 증언이 실린 기사가 등장했다. 2000년대 초에 탈북한 김영순씨다. 1953년에 최승희의 제자가 되었다는 그는 스승 최승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는 최승희의 가르침을 “강약과 굴곡, 매듭, 호흡을 강조했다”고 요약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최승희 춤의 원형은 사라졌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하체는 최승희 동작이 맞지만, 상체는 최승희 춤이 아니다. 최승희의 춤은 어깨가 다소곳하다. 젖히지도 않고 오그라들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오지 않고 뒤로 밀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승희 춤이 부활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말도 남겼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이성경 '심쿵'
  • 이성경 '심쿵'
  • 전지현 '매력적인 미소'
  • 박규영 ‘반가운 손인사’
  • 임윤아 '심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