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은 경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승희무용연구소’였다. 때마침 최승희가 도쿄 고지마치구(麴町區) 구단사카(九段坂)에 있는 다이쇼(大正) 빌딩에 새로 집을 마련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3층이 연구소였다. 최승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기나미구(杉竝區) 에이후쿠초(永福町)로 이사한다. 500평가량의 넓은 땅에 당시 유행하던 ‘모던 주택’을 새로 지어서였다. 1936년 10월에는 연구소도 아예 이 집으로 옮겼다.
일본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는 동안 최승희의 살림 형편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우선 1935년에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반도의 무희’가 4년 장기 상영을 할 만큼 흥행을 거두면서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승희는 그 즈음에 일본에서 인기 광고 모델로도 활동해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아사히그래프’ ‘선데이메일’ 등의 잡지에 자주 등장했다. 학용품·약품·화장품·과자류 등 모델을 한 상품도 다양해 당시 최승희의 인기를 짐작케 한다.

이 시기 최승희의 한국인 제자가 김백봉이다. 김백봉은 1941년 6월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김백봉의 초창기 체험담에서 최승희의 독특한 제자 교육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는 선생님(최승희)이 무용을 거의 가르쳐 주지 않았다. 2층 연습장 위 다락방에 몰래 숨어 열쇠구멍을 통해 연습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흉내를 내는 식이었다.”
![]() |
1943년 10월 극장 분장실에 함께 모인 최승희와 제자들. 뒷줄 왼쪽 시계방향부터 이석예, 장추화, 하리타 요코, 최승희, 김백봉. |
“어느 날 불쑥 제자를 불러내 ‘저 언니가 하던 것 해봐’라는 식으로 테스트를 했다. 그때 선생님 눈에 들어야 본격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하루에 10시간은 보통이고 어떤 날은 밤을 새워 20시간도 가르쳤다.”
당시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얼마나 엄했던지 김백봉은 지금도 최승희를 ‘선생님’으로 호칭한다. 사적으로는 ‘형님’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러본 것은 평생 동안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 것이다.
![]() |
북한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 단원들이 ‘부채춤’(왼쪽)과 ‘장미춤’을 추고 있다. 북한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다. |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함께 생활했던 연구생들이 채 1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최승희는 1944년 3월 중국으로 본거지를 옮길 때까지 9년 가까이 일본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중 조선인 장추화, 이석예, 일본인 하리타 요코(針田陽子) 등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김백봉을 포함한 이들 4명은 최승희가 1943년 8월 중국 공연을 떠날 때 대동한 제자들이다. 이들 4명과 함께 최승희는 그해 10월 상하이 메이치(美琪)극장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역사적인 중국 공식 데뷔 공연을 가졌다. 공연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연 도중에 중국의 대표적인 경극 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을 만난 것은 ‘동양 발레’ 부흥의 꿈을 가졌던 최승희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최승희가 중국에서 처음 제자들을 받아들인 것은 1944년 말 베이징에서였다. 최승희는 이에 앞서 그해 3월에 말기로 접어든 태평양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건너와 있던 참이었다. ‘구양서정(歐陽抒情)’이란 극단 산하에 ‘최승희무용 단기훈련반’을 설치하고, 조선무용과 일반무용을 가르쳤다. 1945년 3월에는 베이징 싼쭤대로에 집을 마련하고,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를 열었다.
광복 후 월북한 최승희는 6·25 전쟁 도중인 1951년 11월 일행 10여명과 함께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피신하게 된다. 북한 주석 김일성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배려로 이듬 해 3월 중앙희극학원 안에 ‘최승희무도연구반’을 개설한다. 이 연구반은 정원이 100명을 넘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최승희가 이때 길러낸 제자들이 나중에 중국 무용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 |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또 다른 제자 중 한 명이던 중국 네이멍구성의 스친타를하는 최승희와 첫 만남을 ‘천당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최승희가 가르친 과목은 발레, 신흥무, 남방무, 중국 무용 등으로 다채로웠다. 그는 무용 기교뿐 아니라 “최승희 선생의 무용이론, 창작 사상, 민족 무용에 대한 집념, 무용예술에 대한 헌신”을 배웠다. 그는 “나의 전 생애를 좌우한 이정표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최승희가 1946년 7월에 월북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월북 한 달 보름여 만에 초고속으로 평양에 ‘국립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소했다. 일제 때 요정이었던 대동강변 3층짜리 동일관 건물에서였다. 냉면으로 유명한 지금의 옥류관 자리에 있었다. 이 연구소는 김일성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아 정원 30명의 3년제로 운영됐다. 이 연구소는 1953년에 ‘국립최승희무용학교’로 승격된다. 이때 재학생 숫자는 800여명에 달했다. 1958년 8월 안막의 숙청과 함께 최승희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10월 최승희무용학교의 운명 또한 국립예술대학 무용학부로 격하되고 만다.
북한에서 최승희의 활동은 한국에 아직까지 극히 제한적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제자 양성에 관한 기록도 아주 단편적이다. 2010년에 한 신문에 최승희의 평양 시절 제자 증언이 실린 기사가 등장했다. 2000년대 초에 탈북한 김영순씨다. 1953년에 최승희의 제자가 되었다는 그는 스승 최승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는 최승희의 가르침을 “강약과 굴곡, 매듭, 호흡을 강조했다”고 요약했다. 그는 “북한에서도 최승희 춤의 원형은 사라졌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하체는 최승희 동작이 맞지만, 상체는 최승희 춤이 아니다. 최승희의 춤은 어깨가 다소곳하다. 젖히지도 않고 오그라들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오지 않고 뒤로 밀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최승희 춤이 부활할 것으로 확신한다”는 말도 남겼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