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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8〉 집안 살림은 ‘알뜰살뜰’… 작품에는 선뜻 ‘큰 돈’

입력 : 2017-01-14 03:00:00 수정 : 2017-01-13 20: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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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돈 쓰지 않는 ‘짠순이’… 무용 공연 준비엔 아낌없이 내놔
1937년 12월 최승희가 영화 ‘대금강산보’ 출연자 등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뒷줄 가운데에 안막·최승희 부부와 부친 최준현의 모습이 보인다.
“밥 이외에 계란 하나를 더 먹으면 그 계란값은 따로 내야 했다.”

최승희가 월북한 뒤 살던 평양 집의 밥상머리에서 실제로 벌어진 광경이다. 이 회고담을 남긴 사람이자 당시 계란값을 치렀던 주인공은 최승희의 시동생 안제승 전 경희대 교수다. 최승희와 같이 월북한 안제승이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 부소장이자 예술감독을 맡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계란이 귀한 시절이라 해도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안제승의 증언에 한 술 더 뜨는 얘기도 있다. “독감에 걸려 아스피린을 하나 먹었다. 그 즉시 내 방으로 사람을 보내 약값을 받아갔다”는 것이다. 최승희는 시동생일지라도 좀 야박하리만치 이처럼 셈을 따졌다. 


심지어 남편 안막이나 오빠 최승일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누구든 선생님(최승희)한테 돈을 받아 가려면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일을 해야 했다”고 안제승은 나중에 말했다.

이런 일을 같이 겪은 동서 김백봉의 눈에 비친 형님 최승희의 살림 솜씨는 ‘알뜰’의 대명사였다. 최승희는 반찬으로 젓갈이라면 거의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석굴젓과 하얀 새우젓을 으뜸으로 쳤다. 팬들로부터 가끔 좋아하는 젓갈 선물을 받으면 귀한 보약이라도 되는 양 조금씩 아껴 먹을 정도였다. 제자들에게 바느질이라도 한 번 시켰다가 대충 해온 듯싶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때론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바느질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마치 잣대를 대고 한 것처럼 늘 줄이 반듯했다.

여기서 엿보이듯 최승희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은 연구소에서든, 집안에서든 살림을 하는 데도 그대로 나타났다. 최승희는 “월급은 월급이고, 생활비는 생활비”라는 식으로 생활 속에서 작은 돈을 쓰더라도 공과 사를 분명히 가렸다.


1922년 최승희와 서모(庶母). 최승희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입학 당시 모습이다.
1935년 최승희·안막 부부와 딸 승자의 모습.
1936년 최승희와 부친 최준현 등 가족들.
최승희의 돈에 대한 관념을 한마디로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게 바로 돈이었다. 일제 말기에 해당하는 1941년 이후 최승희는 군 위문 등의 명목으로 만주를 비롯한 중국 공연을 자주 다녔다. 이 시절에 최승희는 같이 고생하는 단원들에게 가끔씩 얼마간의 용돈을 손에 쥐여주곤 했다. 출연료를 받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시절에 제자들에게는 아주 요긴한 돈이었다.

당시 중국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일본과 한창 전쟁 중이었다. 극도의 사회 혼란 속에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중국인들이 급한 김에 팔려고 내놓은 각종 여성 패물들이 길거리에 넘쳐났다. 급매물이다 보니 귀한 것들이 많이 섞여 있었지만 헐값이었다. 단원들이 대부분 여성들이니 맘에 드는 패물을 보면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바람에 돈이 없어 더러 끼니를 거르는 단원들도 생겨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승희는 제자들에게 “밥도 굶고 그런 짓을 한다”고 크게 호통을 쳤다. 최승희의 눈에는 그게 낭비로 보였던 것이다. 그 길로 최승희는 이런 식의 용돈 지급을 중단해 버렸다. 그리고 단원들에게 먹을 것을 직접 사주는 것으로 이를 대신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는다’는 생각은 최승희에게 거의 철학에 가까웠다. 그 뿌리는 숙명여고보 시절에 일제 토지조사 과정에서 직접 목격한 집안의 몰락이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부모가 학교에 다니는 막내딸 최승희 만큼은 굶기지 않으려 서로 숟가락 들기를 사양했을 만큼 곤궁해졌다.

“나 역시 세 번에 한 번꼴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밥을 먹지 않고 학교에 갔었다.” 최승희가 ‘자서전’에서 피력한 당시 심경이었다. 숙명여고보의 학비 지원으로 어렵사리 졸업할 수 있었다. 마음에 없는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하려 한 것도 순전히 학비가 무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곱게 자란 최승희가 돈의 ‘무서움’과 ‘귀함’을 처음 뼈저리게 느낀 계기였다.

최승희가 돈이 없어 겪은 고생은 1926년 4월 일본에 건너간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시이 바쿠의 내제자(內弟子)로서 수업료는 내지 않았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용돈은 무용연구소에서 주는 한 달 2~3원 안팎이 전부였다. 1929년 8월 경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를 아껴 쓰며 3년 넘게 이를 악물고 버텼다.

1933년 2월 두 번째 일본 유학을 떠난 뒤 최승희는 더 어려운 생활을 했다. 이미 안막과 결혼도 했고, 딸 승자도 태어난 뒤였다. 따로 방을 얻을 돈이 없어 최승희 일가족은 한때 시숙인 안보승의 숙소 송풍관(松風館)에서 얹혀 산 적도 있었다. 안막의 큰형인 안보승씨는 당시 제국음악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최승희에게는 오빠 최승일, 제자 김민자 등 군식구까지 딸려 있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안막은 모자라는 가족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남의 집 눈을 쓰는 등의 ‘알바’를 하기도 했다. 그 품삯이라야 당시 50전 안팎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최승희 가족은 당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런 고생을 했던 안막이지만 천성이 남 퍼주기를 좋아했다. 돈은 물론 쓰고 나간 모자까지도 지인들에게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에게서 최승희는 평생 월급 봉투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한 생활고는 고스란히 최승희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 절정은 1938년 미국 생활이었다. 최승희가 그해 2월까지 계속했던 미국 순회공연은 이내 중단되고 말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재미교포들이 ‘친일파’라며 공연을 방해하고, 일본 당국으로부터는 ‘배일(排日)’ 의심을 받는 등 샌드위치 신세가 된 결과였다. 그해 말까지 최승희 가족이 10개월 가까이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숙소 수준이 급전직하를 거듭했다.

이 일화에서 당시 궁핍했던 생활상이 미뤄 짐작된다. 호텔에서 모텔로, 아파트로 전전하다가 맨 마지막에는 할렘가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최승희가 현지 화가들의 모델 활동을 했던 것도 당시 생활비를 벌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최승희가 “돈이 없으면 죽는다”는 신념 아닌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일련의 역경 때문이었다. 최승희가 돈에 관한 한 심하다 싶을 만큼 철저한 면모를 보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최승희를 무슨 ‘돈벌레’라든가 ‘수전노’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오해에 불과하다. “귀한 돈은 귀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 최승희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달리 말해 헛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최승희는 “돈이란 일할 때 쓰고, 필요할 때 쓰는 것”이라고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최승희에게 일은 곧 무용이었다. 무용할 때 들어가는 돈은 말 그대로 ‘펑펑’ 쓰는 스타일이었다. 무용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은 소품까지도 꼼꼼히 챙기고 그 액수가 크든 작든 아끼는 법이 없었다. 최승희가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 오빠 최승일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난다.

“조선 춤의 반주를 레코드로 하니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만약 가야금이나 대금을 하는 사람으로서 서양 음악의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곧 보내 주십시오.”

더구나 최승희가 원하는 악사는 늘 ‘당대 최고’였다. 이왕직 아악부 수장 출신으로 인간문화재인 해금 명인 김천흥이 대표적이다. 그런 악사를 공연에 동반하면 그것은 곧 많은 비용 증가를 의미했다. 하지만 최승희는 이런 데 돈을 쓸 때는 주판알을 굴리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안막의 본가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적이 있었다. 안보승의 회고록에 이와 관련해 최승희의 ‘통 큰’ 씀씀이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나온다. “쪼들리는 가세를 지탱할 길이 막연했다. 그런데 필승으로부터 일금 삼십만원이 들어 있는 정기예금통장이 등기로 보내 왔다. 너무도 큰 돈이라 한편 놀랍고 한편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최승희의 ‘반도의 무희’ 영화 출연료였다. 최승희는 앞서 언급했던 돈을 쓰는 것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승희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를 회상하며 안보승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혈육의 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듣고 난 후 최승희 시아버지 안기선옹이 보인 넓은 도량이 더 돋보인다. 아들에게 “그들의 아름다운 마음씨만 받아들이자”고 ‘분부’했다는 것이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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