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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6〉 마지막 꿈 ‘동양 발레’론… 중국 경극서 무용 독립의 길 닦다

입력 : 2016-12-31 03:00:00 수정 : 2016-12-30 19: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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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무용 기초 익히고 창작… ‘동양의 미’ 뽐내다 최승희가 ‘동양 발레’란 이름으로 첫 시도를 했던 때는 1941년이었다. 1938년부터 3년 가까이 미국, 유럽, 남미 순회공연을 마치고 1940년 12월 일본으로 돌아온 뒤였다. 최승희는 동양 발레의 건설을 꿈꾸며 그해 9월부터 2개월간 ‘노우(能)’를 비롯해 일본 전통무용의 기초를 익힌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적 무용 기법을 가미해 ‘신전의 춤’ ‘칠석의 밤’ ‘무혼’ 등의 작품을 창작해 발표했다. 이를 통해 동양 발레의 매력을 새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최승희는 1942년 1월 마침내 ‘최승희 동양발레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최승희 개인 차원의 연구소 성격이었다.

동양 발레를 하려면 한·중·일 3국의 무용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했다. 그때까지 최승희는 중국 무용을 체험하거나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최승희는 유럽 순회공연 때부터 중국으로 진출하겠다는 꿈을 꿨다.

“파리에서 만난 작곡가 첼프닝씨가 중국 예술을 얘기하며 북경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면서 나더러 동양 발레를 창작하고 또 주역 무용수로 뛰어달라는 권유를 수차례 하길래 승낙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최승희의 중국행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대동아전쟁’ 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 묘수로 최승희가 내건 명분이 1942년 6~7월의 중국 주둔 일본군 위문공연이었다. 최승희가 천신만고 끝에 중국 베이징(北京)에 입성해 일반 공연을 가진 때는 1942년 8월이었다. 최승희는 당시 베이징에서 모두 18차례의 공연을 했다. 최승희가 중국에 간 것은 동양 발레 건설이라는 큰맘을 먹고서였다. 중국 전통무용의 실체를 더 알기 위해 베이징을 벗어나 톈진(天津), 칭다오(靑島), 타이위안(太原), 다퉁(大同) 등지로 공연 여행을 자청했다.

1952년 최승희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앞줄 가운데). 저우언라이는 최승희가 숙청된 뒤인 1960년에도 최승희의 무대를 북한 측에 비밀리에 부탁했을 정도로 열렬한 팬이었다.
최승희는 바쁜 일정에도 틈틈이 중국의 노래극, 연극 등 관련 공연을 관람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최승희는 중국 무용의 의상, 음악, 시문 등의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공연 마지막 일정이었던 산시(山西)성 다퉁에서는 5세기 북위시대 유적인 윈강(雲崗)석굴을 일부러 짬을 내서 찾았다. 여기서 최승희는 서양문화와 차원을 달리하는 동양미의 진수를 뒤늦게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최승희가 파악한 당시 중국 전통무용의 현주소는 독립된 예술분야가 아니었다. ‘경극(京劇)’ 등 중국의 전통 연극에서 부속물 같은 대접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최승희는 곧바로 중국 전통극을 소재로 ‘명비곡(明妃曲)’ ‘향비(香妃)’ ‘양귀비 염무지도(艶舞之圖)’ 등을 창작한다.

이 작품들을 포함해 신작 15개, 기존 작품 17개를 그해 12월 도쿄(東京) 무대에 올린다. 중국뿐 아니라 조선, 일본 무용 작품을 한꺼번에 선보인 것이 특색이었다. 동양 3국의 무용 해설을 공연 중에 곁들인 형식도 처음 시도했다. 보름 동안 24회 연속 독무공연이라는 세계 무용계 최초의 기록도 함께 세운다.

최승희가 두 번째로 중국에 건너간 것은 이듬해인 1943년 8월이었다. 그가 고대했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반 공연은 10월 하순에야 성사됐다. 역시 중국 주둔 일본군 위문공연이라는 ‘의무’를 수행한 뒤에야 허용되었다. 최승희는 2년 전 새로 지은 상하이의 유명한 메이치대희원(美琪大戱院)에서 10월 19일부터 8일 동안 성공적인 공연을 가졌다. 

1943년 10월 중국 상하이 메이치대희원에서 공연을 가진 최승희가 중국 경극의 명배우인 메이란팡(梅蘭芳)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동양을 대표하는 두 스타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상하이 공연 중에 최승희에게 가장 특별한 일은 중국 경극의 명배우인 메이란팡(梅蘭芳)을 만난 일이었다. 동양을 대표하는 두 스타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메이란팡은 최승희에게 “동방무용예술의 부흥을 위해 중국, 일본, 조선 예술 전통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 대해 진심으로 탄복한다”면서 “나 역시 동양예술의 부흥과 창조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두 사람은 동양 무용 발전의 동반자로서 길을 걷는다.

최승희와 메이란팡이 다시 만난 것은 1945년 3월 말 상하이에서였다. 1944년 12월 베이징으로 다시 건너와 ‘최승희 동방무도연구소’ 문을 연 직후였다. 이때 둘은 동양 무용에 대한 깊은 담론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최승희(오른쪽)와 중국 경극의 명배우인 메이란팡(가운데). 두 사람은 1943년과 1945년에 중국에서 만났다. 촬영 장소와 연도는 미상.
메이란팡은 “당신은 과거 동양예술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가하여 새로운 동양무용을 건립했다”면서 최승희를 ‘진정한 동양무용의 창조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두 사람은 또 중국 무용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노력을 같이 다짐한다. 

1951년 중국 베이징 중앙희극학원 최승희 무도연구반 학생들. 최승희는 1951년 3월 중국중앙희극원 안에 ‘최승희무도연구반’을 개설했다.
최승희가 세 번째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1950년 11월이었다. 6·25전쟁 발발 후 최승희 역시 개인적으로 평양의 무용연구소가 폭격을 맞아 폐쇄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런 전쟁의 와중에 무용활동을 위해 중국행이라는 탈출구 마련에 남편 안막이 나서 주었다. 안막이 김일성을 움직였고, 김일성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주선했다. 그때만 해도 안막이 북한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최승희는 일행 15명과 함께 먼저 베이징에 안착했다. 뒤이어 남편 안막과 딸 성희, 아들 병건까지 합류했다. 1951년 3월 중순 최승희는 중국중앙희극원 안에 ‘최승희무도연구반’을 개설한다. 최승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저우언라이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저우언라이는 최승희의 열렬한 팬이었다. 두 달 후 베이징 청년예술회관, 창안(長安)극장에서 열린 최승희의 공연을 직접 관람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최승희가 숙청된 뒤인 1960년에도 최승희를 무대에 세우기를 김일성에게 비밀리에 부탁했던 것으로 나중에 알려졌다. 최승희무도연구반 1기생 제자들만 무려 110명에 달했다. 이들을 포함해 중국에서 최승희가 양성한 직업적인 무용 인재는 200여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한족 외에 조선족, 몽골족 등 중국 내 소수민족도 적잖이 포함돼 있었다. 최승희가 한편으로 힘을 쏟았던 것은 중국 경극 개혁이었다. 그 초점은 경극으로부터 무용을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일찌감치 의기투합한 메이란팡과 함께 했다.

이에 대한 최승희의 생각을 집약한 것이 1951년 2월 28일자 중국 인민일보에 실린 장문의 ‘중국 무용예술의 장래’란 글이었다. 무용 소재가 풍부한 중국의 희곡에서 무용을 독립시키자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최승희는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오늘의 파종은 바로 래일의 휘황한 성취를 예시하여 주는 것”이라는 자신감과 기대감을 피력한다. 메이란팡과 손을 잡고 최승희가 뿌린 씨앗이 결실을 맺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승희가 이를 위한 이론화 작업도 병행해 내놓은 성과가 ‘중국희곡무용의 기본 동작’이란 저작이다. 이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중국무용 교재였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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