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까라면 까! 뭔 잔말이 그렇게 많아?” “군대는 원래 이런 곳이야. 남들도 다 그렇게 하고 전역했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그냥 2년만 조용히 참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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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의 병영문화혁신 정책에도 병영 내 부조리는 그치지 않고 있다. |
군에 입대한 사람이라면 세대를 불문하고 한 번은 듣게 되는 말들이다. 병역의 의무를 법률로 규정한 우리나라에서 전역한 사람들 중에 군대에서의 기억에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역자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 가보면 부대 내 선임병에 대한 비난, 부대에서 겪었던 부조리한 일 등 부정적인 말들이 더 많이 들리는 게 현실이다. 어디 그 뿐인가. 자신을 괴롭힌 선임병을 전역 후 고발해 법정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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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병사가 수송헬기를 통해 실려오는 보급물자를 바라보고 있다. 육군 제공 |
선임병의 가혹행위에 따른 자살사건과 규정을 어긴 사고도 계속 일어난다. 지난달 군인권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6사단 GP에서 선임병들의 모욕과 구타에 시달리던 박모 일병이 지난 2월 7일 근무 도중 총으로 자살했다. 이 때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군의 경계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박 일병은 자살 전 후임병에게 “북한을 감시하면 뭐하냐. 전쟁터는 여기있는데”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하지만 군사법원은 1심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선임병 3명에게 “젊고, 전과가 없고, 범행을 인정하였으며, 반성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해 공분을 샀다. 지난 13일 경북 울산 53사단 예바군훈련장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는 훈련에 써야 할 폭음통 1600여발이 남자 책임 추궁이나 인사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해체한 뒤 현장에 버린 폭약이 터지면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국방부가 병영문화혁신 정책을 시행하는 상황에서, 세계 TOP 10의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군에서 전근대적 병영 부조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비뚤어진 상명하복과 전우의식이 원인
군대는 국가를 지키고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일반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군대 문화’라는 것 역시 이같은 특수성에 기인해 만들어졌다. 일사불란한 명령 체계와 강한 전우의식, 기강에 기반하는 군대 문화는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군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군대 문화는 단기간에 높은 수준의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군인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데 따른 위험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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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차에 탑승한 병사가 훈련을 앞두고 기관총을 잡고 있다. 미 육군 제공 |
중세와 근세 시대 유럽의 군대는 의무복무제를 통한 ‘국민군’이 아닌, 용병에 기반한 ‘정부군’에 가까웠다. 민족의식이나 국가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에게 “적 대포를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면 병사들을 ‘전쟁 기계’로 만들어야 했다.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바보’가 필요했다는 의미다. 금화 한 닢의 유혹에 빠져 입대 지원서에 덜컥 서명한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몰려면 엄정한 기강이 유지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무자비한 구타 등 가혹행위가 뒤따랐다. 이같은 과정을 거친 병사들은 적군이 총을 겨누고 있는 진지를 향해 대오를 갖춰 행군하는 것을 즐기는 ‘바보’가 된다.
이같은 특징은 프로이센 군대를 모방한 구 일본군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초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본 사람이라면 남자 주인공들이 일본군에 입대했을 때 구타와 욕설, 차별, 사적 제재 등에 시달리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해방 후 한국군에도 이어져 구타와 가혹행위를 통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미덕인 ‘바보 정신’을 유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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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훈련소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을 실시하는 훈련병과 교관. 육군 제공 |
‘바보 정신’이 군대 문화의 또다른 특징인 획일화와 합쳐지면 우리 사회의 병폐인 ‘왕따’로 이어진다. 모든 병사들은 군이 요구하는 수준에 자신을 맞추도록 요구받는다. 거기에 맞추지 못한 사람은 낙오될 수밖에 없다. 낙오자들이나 사회 내에서도 소수자였던 사람들, 군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군대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은 다수에게 공격의 대상이 된다. 군대가 제시한 기준을 충족한 다수의 병사들은 소수자들을 공격하면서 일종의 비뚤어진 동료의식을 느끼게 된다. 피해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상부에 보고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도 의식하지만 무엇보다 전우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왕따를 주도한 상급자 입장에서는 부대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겠지만 이같은 방식은 동료의식을 구축하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나쁜 행위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기쁨조’를 운영하며 측근들과 비밀 파티를 벌이는 추잡한 행위를 지속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금기시된 파티를 열어 술을 마시고 여자를 희롱하면서 내적으로 쌓이는 죄의식을 통해 ‘우리는 동지’라는 잘못된 연대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왕따가 지속되면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조직에서 배척되지 않기 위해 참여한다. 인신공격, 폭언, 협박, 가혹행위, 성추행, 구타 등 가혹행위가 도를 더해가는 상황에서 군 부대라는 울타리에 갇혀 탈출구가 없는 피해자는 말 못할 고통에 신음한다. 신고하면 그에 따르는 불이익이 걱정돼 침묵할 뿐이다. 겉으로 볼 때는 성과를 잘 내는 리더십이 존재하는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조리와 침묵, 외면으로 구성된 반인권적 리더십이 자행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실사판이 병영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 민주화 시대에 걸맞는 리더십과 군대 문화 필요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군대의 존재 이유이며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덕목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명령이나 부조리까지 묵묵히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군대니까’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회에서 일어난 부조리에 대해서는 검찰, 경찰에 고발하거나 언론에 제보를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군 내에서 발생한 문제는 침묵하는 태도는 앞뒤에 맞지 않는다.
불합리한 명령과 부조리에 따르는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명령에 무조건 순응하는 ‘바보’ 대신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요구할 줄 아는 ‘똘똘이’가 되어야 한다. 군에서 내려오는 명령은 일반적으로 관련 규정에 근거해 이루어지지만,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에 의존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명령이 규정에 부합하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본인 스스로 관련 규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규정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명령을 수행하면 법과 규정은 물론 상식에도 맞지 않는 부조리가 벌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부조리는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면서 병영을 안에서부터 곪게 만들며, 외부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면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며 이해하기 힘든 반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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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소에서 경계훈련중인 해외 파병부대원들. 합참 제공 |
명령을 내리는 간부들의 리더십도 민주화시대에 걸맞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복무경험이 오래된 간부들 사이에서는 관습에 의존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리더십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가혹행위를 군 기강 확립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에서는 병사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방식이다. 민주화 시대의 특징은 설득과 존중이다. 병사들에게 ‘이 명령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면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명령을 수행한다. 때로는 간부가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도 만들어낸다. 이같은 리더십은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소부대 전투가 많은 한반도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필수적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 군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인권 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바뀐 상황을 고려해 병영 문화를 혁신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하지만 바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하면 거북이 수준이었다. 항공모함이 방향을 바꾸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수십만 대군을 유지하는 군 조직이 변화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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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윤 일병 집단 폭행사망사건 직후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가해자들. 육군 제공 |
이같은 문제점이 곪고 곪아 터진 것이 바로 윤 일병 집단폭행사망사건이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병영문화혁신을 추진하면서 가혹행위 등 부조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있지만 ‘탑-다운’(Top-Down) 방식의 혁신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병사들 스스로 깨닫고 행동해야 부조리가 사라질 수 있다. 동료의 행동 중에서 잘못된 것은 서로 지적하고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인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군의 부조리는 영원히 지속된다. 그리고 그 피해는 결국 본인에게 돌아온다.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그 권리를 지키려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알려면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 입대하기 전 군대에 대한 서적을 읽어보거나 전역한 선배를 찾아가 관련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다. 이미 입대한 사람이라면 부대 내 비치된 규정집을 읽어보거나 병영생활상담관을 찾아가 상담을 받는 것도 좋다. 군도 사회도 침묵하는 바보에게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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