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일은 무용 입문부터 시작해 최승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피붙이다. 최승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했고, 그 자신이 나중에 자진하여 월북을 감행한 좌익 인사였다. 그런 오빠의 눈에 비친 최승희의 사상에 관한 언급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최승희는 한마디로 춤에 미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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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창작한 대표적 무용극 중 하나인 ‘사도성의 이야기’. 신라를 배경으로 성주의 외딸 금희와 가난한 어부 출신 무사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최승희가 오랫동안 꿈꾼 ‘코리안 발레’의 진면목을 보여준 야심작이다. 소련을 비롯한 해외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
최승희의 월북 후 첫 공연은 이런 김일성의 파격적 호의에 대한 답례 성격이 짙었다. 최승희의 북한 첫 공연은 예상보다 빠른 1946년 10월 열렸다. 북한 땅을 밟은 뒤 두 달 보름여 만이었다. 최승희가 이처럼 서두른 것은 김일성 초대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당시 북한 당국으로부터 자신의 무용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마침 주빈인 김일성과 함께 당시 북한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최승희로서는 그동안 갈고닦은 무용 실력을 그들의 눈앞에서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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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최승희가 처음 무대에 올린 무용극 세 편 중 하나인 ‘반야월성곡’. 이 작품은 신라 말기 빈농의 딸 백단을 주인공으로 토호세력에 맞선 농민들의 투쟁을 형상화했다. 지금도 최승희의 대표적 무용극 중 하나로 꼽힌다. |
최승희는 짧은 준비 기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장군에게 올리는 헌무’를 새로 만들어 이 무대에 올렸다. 이는 작품성을 떠나 최승희가 김일성을 의식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공연이 끝난 후 김일성이 크게 만족해 직접 무대에 올라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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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방소(訪蘇)예술단은 서울로 남행해 남한 전역을 도는 인민군 위문공연에 나선다. 최승희는 중국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2년 이후에야 북한 일대에서 인민군 위문공연에 참여한다. |
이 공연 후 최승희는 해방과 함께 다짐했던 ‘코리안 발레’, 곧 무용극 창작에 나섰다. 광복 이전까지 최승희는 독무 등 뛰어난 개인기를 보여주는 무용이 주류였다. 무용극 창작은 주로 혼자 추는 춤에서 집단무용 중심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또 이 무용극은 우리 무용사에서 처음 시도되는 선진적 발상이었다. 그 이전 우리 무용에서는 춤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는 해설로 메우는 식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승희는 사상 최초로 무용극 형식을 도입했다. 그리고 이를 작품을 통해 체계화하는 데 평생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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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평양에 세운 최승희무용연구소 단원들의 1953년 모습. |
최승희의 춤에 매료된 김일성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직접 공연장을 찾았다. 1949년 8월 15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4주년 해방기념축제가 대표적이다. 이날 최승희는 김일성 앞에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를 소재로 한 대작 ‘해방의 노래’를 무대에 올린다. 북한판 ‘새로운 조국 건설’이라는 주제에 김일성 또한 크게 만족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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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봉지하극장 입구의 모습. 최승희는 모란봉지하극장 위에 새로 지은 모란봉극장에서 1954년 11월 ‘사도성의 이야기’를 초연한다. |
이 위문공연단에 최승희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직후에 최승희는 남편 안막의 권유로 중국으로 피란을 떠났기 때문이다. 1952년 9월에야 최승희는 다시 귀국했다. 최승희가 북한 일대에서 인민군 위문공연에 참여한 것은 그 이후였다. 여러 공연작 중 ‘조선의 어머니’는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54년 11월, 최승희의 ‘사도성의 이야기’ 초연 때도 김일성은 기꺼이 발걸음을 해주었다. 공연장은 6·25전쟁 기간 중 건설한 모란봉지하극장 위에 새로 지은 모란봉극장이었다. 전체 5막6장으로 구성된 ‘사도성의 이야기’는 최승희가 창작한 대표적 무용극 중 하나다. 시대적으로는 신라 왕 ‘조분이사금’ 때, 공간적으로는 경주 동해안에 있는 가상의 사도성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성주의 외딸 금희와 가난한 어부 출신 무사의 사랑 이야기가 줄거리다.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꿈의 메시지를 담았다. 최승희가 오랫동안 꿈꿨던 ‘코리안 발레’의 진면목을 환상적으로 보여준 야심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완성도가 높아 김일성을 비롯한 관람객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나아가 그 후 소련을 비롯한 해외공연에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사도성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최승희가 주연과 안무를 맡았고, 북한 최초로 무용극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였다. 북한에서 만든 첫 컬러영화라는 점에서 역사성도 있었다. 이 영화는 1990년대 말 러시아에서 필름을 발굴해 국내에서도 공개돼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1955년은 최승희의 무용 생활 30년이 되는 해였다. 1926년 4월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 문하생으로 입문한 해부터 헤아려서다. 그해 8·15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최승희는 ‘공화국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북한에서 무대예술가에게 주는 최상의 명예였다. 이를 기념하는 공연도 가을에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도 김일성이 참석했다. 북한의 고위층과 평양 주재 외교사절까지 참석한 성대한 잔치였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최승희가 김일성을 공연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해 여름 딸 안성희는 ‘옥란지(玉蘭池)의 전설’ 안무를 맡아 모란봉극장 무대에 올렸다. 1953년 모스크바 무대예술대학 안무과로 유학을 떠났던 딸의 귀국 기념공연이었다. 그 작품의 대본은 최승희가 썼다. 그 극장에 김일성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김일성은 무대 위에 올라 꽃다발을 딸 안성희에게 직접 안겨준다. 1956년 1월 북한 문화선전상 부장으로 승진한 안막은 이 장면에서 손수건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감격했다. 딸을 무용가로 성공시키기 위해 직접 가르치고 온갖 뒷바라지를 했던 최승희에게도 인생 최고의 날로 꼽을 만했다. 공식 기록상으로 최승희가 김일성을 공연장에서 만난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공교롭게도 최승희는 그 이후 북한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1956년 창작 무용극 ‘맑은 하늘 아래에서’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안막이 구상했고, 최승희가 안무 겸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시연회(試演會) 때부터 ‘사상성 결여’ 등의 이유로 북한 노동당의 비판을 받아 여러 차례 수정을 거듭하게 된다. 월북 후 최승희가 맞이한 시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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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
2011년 최승희 탄생 100돌 기념행사가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월북 예술인으로 오랫동안 언급조차 금기시됐던 최승희 재조명 작업이 남한에서도 점차 그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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