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으로 지친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비포장 흙길을 걷다보면, 행군 대열 뒤쪽에서 “좌우로 밀착!”이란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좌우로 밀착!”을 외치며 반사적으로 길가로 이동하면 부대 지휘관을 태운 ‘찝차’, 장비를 실은 ‘60트럭’과 ‘닷지차’가 흙먼지를 자욱하기 일으키며 앞서나간다. 155㎜ 곡사포 견인트럭과 토우 미사일 탑재 지프 등 사단 직할대 소속 차량들도 쌩하며 달려간다. 차량들이 만든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면 “누구는 줄 잘 서서 차량 타고 복귀하고, 누구는 완전군장하고 걸어가고…” “나도 타고 싶다”라는 푸념이 절로 나온다. 등에 멘 군장은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발걸음도 무거워지면서 어깨가 자신도 모르게 축 처진다.
보병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운전병들도 나름 애환을 가지고 있다. 부대 간부를 태우고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등 외출의 즐거움도 있다. 반면 운전 도중 눈이 내리면 선임탑승 간부와 둘이서 타이어에 체인을 감느라 고생하던 기억도 있다. 야전수송교육대에서 처음으로 군용차량을 운전할 때 “출발하겠습니다! 우회전하겠습니다!”를 외치며 진땀을 뻘뻘 흘리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군 생활 기간 동안 애증의 대상이었던 군용차량은 현재 5만여대가 우리 군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전차와 장갑차 등 기갑장비 도입에 밀려 개발된 지 20년이 지난 군용차량이 큰 개량없이 계속 쓰이고 있어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신형 차량으로의 교체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군용차량에 번호판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지프나 트럭과 같은 군용차량을 보면 일반 차량과 다른 점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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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1 전차를 실어나르고 있는 육군의 중장비 수송차량 |
승용차를 비롯한 일반 차량은 차 앞뒤에 번호판이 붙어있지만 군용차량은 아무런 표식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군용차량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량이 아닌 군 장비의 일부로 분류된다. 바퀴나 궤도로 움직이는 전차, 장갑차는 120㎜/40㎜ 주포나 기관총으로 적을 공격하는 화기다. 반면 병력이나 물자를 수송하는 트럭 등 군용차량은 기동장비다. 군용차량들은 자동차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자동차라기보다는 군수품관리법에 규정된 장비에 더 가깝다.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되고 외형도 자동차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로를 달리는 군용차량은 번호판이 없다. 다만 군용승용차량은 군용차량으로 등록하고 번호판을 다르게 이용할 뿐 형태나 이용목적은 일반차량과 같다.
군용차량은 일반 자동차에 비해 무게가 무거운 편이다. 손으로 차체를 쳐보면 강철판을 두드리는 것처럼 묵직하고 튼튼한 느낌이다. 속도와 승차감을 우선하는 자동차와는 달리 군용차량은 거친 도로를 달리는데 지장이 없어야 하며 적의 공격으로부터 탑승인원을 일정부분 보호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때문에 군용차량은 속도를 희생하는 대신 내구성을 높이는 특성을 갖는다.
◆ 미군 지프에서 신형전술차량까지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 직후 일본군이 남기고 간 트럭과 미군의 윌리스 지프와 트럭 등을 군용차량으로 사용했다. 6.25 전쟁 중에는 미국이 제공한 일본제 이스즈, 미츠비시 트럭 등이 제공됐고, 휴전 이후에는 미국제와 일본제 차량이 함께 지원됐다. 수량을 맞추는데 급급하다보니 지프만 9종류가 운영됐다. 베트남전을 겪은 1970년대부터는 미국제 차량을 국내 생산하기 시작해 제작과 정비를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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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무반동총을 장착한 K-131 |
1990년대 들어서 이같은 기류에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로 1997년 등장한 ‘레토나’ K-131 지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윌리스 지프를 국산화한 K-111을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K-131은 지휘차량으로 사용된다. ‘레토나’라는 이름으로 민수용으로도 판매돼 군에서도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4명만 탈 수 있었던 K-111과 달리 후방에 4명이 추가 탑승할 수 있어 6명을 태우고 운행이 가능하다. 오디오와 파워핸들을 갖춰 다른 차량에 비해 운전하기 쉬워 운전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민수용으로도 판매된 덕분에 시중에서도 부품을 구할 수 있어 정비가 쉬웠던 점도 인기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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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선부대에 배치되는 소형전술차량 |
운전병들에게 사랑받았던 K-131은 신형 소형전술차량 ‘KM1’으로 대체된다. 전방부대부터 배치되는 소형전술차량은 미국의 대표 군용차량인 험비(HMMWV·고기동 다목적 차량)처럼 지휘, 관측, 기갑수색, 정비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다. 국지전과 시가전의 비중이 높아진 전장환경을 감안해 장병 보호를 위한 방탄성능과 함께 한랭지, 습지, 사막 등 극한 환경에서도 무리 없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고성능을 갖췄다. 대당 가격도 1억원대로서 험비가 약 2억2000만원인 것에 비해 가격경쟁력도 갖췄다. 우리 군은 2021년까지 소형전술차량 2100여대를 확보할 계획이다.
1980년 처음 등장한 K-311 트럭은 ‘닷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미군에서 사용하던 닷지트럭을 일부 개량한 K-311은 구급차, 정비차, 통신차, 화생방정찰차, 적외선 발연 차폐막 체계, 포사격지휘차 등 파생형도 다양하다. 화물은 1.5t까지 탑재 가능하며 무장한 병력 12명을 태울 수 있다. 필리핀, 콜롬비아 등에도 수출된바 있다. 2003년 파워핸들을 장착한 K-311A1이 등장했으며,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용으로 K-319 방탄트럭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구형 설계에 기반하고 있어 소형전술차량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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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돈반’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K-511 트럭 |
미군의 M-35트럭을 1978년 국산화한 K-511 트럭은 우리 군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군용차량이다. 급수차, 급유차, 정비차, 제독차, 유조차 등 다양한 파생형이 개발되어 쓰이고 있다. ‘60트럭’ ‘두돈반’ 등으로도 불리는 K-511은 4.5t의 화물을 실을 수 있고 완전무장한 병력을 20명까지 태우는 게 가능하다. 운전하기 어려운 차량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2003년 등장한 K-511A1는 파워핸들을 장착해 성능이 향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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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지휘 및 행정업무용으로 쓰이는 코란도스포츠. 일반차량을 그대로 쓰고 있어 방탄성능은 없다 |
군에서는 상용차량들도 적지 않게 쓰이고 있다. 수동 변속기와 저출력 엔진을 사용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데다 교통사고가 빈발하면서 포장도로 주행이나 행정용으로 상용차량이 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그 결과 5t 상용트럭과 기아 모하비, 쌍용 코란도 스포츠, 렉스턴 W 등이 군에 도입됐다. 트럭은 도시지역 주둔 부대의 물자/병력 수송용으로 쓰이며, 모하비와 렉스턴 W 등은 행정업무나 외부 방문객 지원 등에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통신장비를 탑재해 지휘용으로도 운영된다. 반면 일반 자동차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방탄성능은 없다.
◆ 미래에는 하이브리드 군용차량 등장할 듯
이르면 2020년대에는 디젤엔진을 사용하는 기존의 군용차량에 변화의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연비를 높이고 소음을 낮추기 위해 군용차량에 하이브리드 체계를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하이브리드 전기구동(HED) 장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HED는 재래식 추진체계와 배터리, 구동장치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이라크 전쟁 이후 군용차량에는 내비게이션과 위성항법장치 등 전자장비가 장착되는 추세다. 전자장비에 전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면서 기동력을 유지하려면 엔진의 연비를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HED는 연료 재보급 없이 운행거리를 연장할 수 있어 차량의 기동성을 개선할 수 있다. 자동차에는 일부 적용되고 있으나 군용차량에는 2020년대 이후에 사용될 전망이다.
미 육군은 2013년 2개의 전기모터와 1개의 경량 디젤엔진으로 움직이는 신형 하이브리드 초경량차량(ULV) 개발에 들어갔다. ULV는 디젤엔진이 모터에 동력을 공급하고 저속에서 높은 토크를 발휘한다. 전기모터 덕분에 구동축이 필요 없어 차체 하부가 급조폭발물(IED)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준다.
기관총 대신 레이저무기가 탑재될 가능성도 있다. 기관총은 지속적인 탄약 재보급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군수지원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레이저무기를 장착하는 방안이 연구되고 있다. 특히 다수의 표적으로 신속하게 공격할 수 있어 무인정찰기를 격추하는데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차량 탑재형 소형 레이저무기 개발이 진행중이다. 우리나라 역시 하이브리드 추진체계와 레이저무기를 개발하고 있어 2020년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군용차량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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