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는 한때 교통체증과 오염 등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생지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보고타 시장선거에 출마한 엔리케 페날로사는 ‘시민이 더 행복해지도록 도시를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도시는 사람에게 친화적일 수도, 자동차에게 친화적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자동차 모두에게 친화적일 수는 없다’고 했다. 시장에 당선된 그는 자동차 없는 날을 시행하고 보행광장, 자전거도로 조성 등에 예산을 투입했다. 이후 보고타 시민들은 ‘자신의 생활을 더 긍정적으로 느끼게 됐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했다.
![]() |
김기호 교수가 3일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현관 로비에서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도시재생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보행환경이 개선돼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든다면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제원 기자 |
3일 서울시립대 캠퍼스에서 ‘걷고 싶은 도시만들기 시민연대(도시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김기호 교수를 만났다. 햇볕이 잘 드는 연구실에서 녹차 한 잔을 앞에 놓고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고 있는 그의 진솔한 얘기를 들었다.
도시공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김 교수의 전공은 도시설계이다. 그는 도시 내 신축 건축물이 인근 건물은 물론 대지를 포함한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해 합리적이며 효율적으로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도시설계에서 건물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만 해도 도시설계 개념이 생소했지만 이제는 상세계획, 지구단위계획으로 바뀌면서 제도화됐다.
서울시 도시재생분야 명예시장인 김 교수는 걸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면 도시가 재생된다고 말했다. 물리적 환경을 좋게 만드는 것도 재생이지만 요즘은 사회 경제적 재생, 나아가 문화적 재생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문화가 유지되면서 지역경제가 살아나면 성공적인 재생”이라며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재생이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면 목이 좋아지고, 이로 인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도심 재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하면서 인간관계를 맺으면 사회적 재생이 된다”고 했다.
그는 걷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광장과 가로가 포함된 공공 공간을 품위 있으면서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도시는 작품이 아니어서 건물 하나가 좋은 도시를 만들 수는 없지만 좋은 가로 하나가 좋은 도시 만들기에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요즘 뜨는 데가 길이잖아요. 인사동길 북촌길 삼청동길 가로수길 로데오길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쇼핑센터보다 건물 밖의 길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김 교수는 길이 살면 도시가 산다는 것을 믿는다. 길의 요체는 보행이어서 안전하고 편리하게 걸을 수 있는 많은 길이 생기면 도시를 살릴 수 있다.
도시연대는 1994년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시민들과 함께 도시환경을 개선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를 지낸 고 강병기 교수가 주축이 돼 만든 도시연대는 1996년 걷고 싶은 서울만들기 운동본부를 출범했다. 시청 앞 서울광장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1997년 서울시 보행환경 기본조례를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2000년까지는 서울시 자치구별로 ‘걷고 싶은 거리 조성사업’에 힘을 보탠 데 이어 최근에는 자투리 땅을 활용한 한평공원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모두 보행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이다.
전국적으로 500여명의 회원과 활동가를 두고 있는 도시연대를 10년째 이끌고 있는 김 교수는 시민들과 함께 힘을 합쳐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고, 걷고 싶은 도시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회원들은 실천적 참여를 통해 주변을 변화시켜 나가는 데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도시의 교통문제는 보행환경을 조성하고 대중교통을 활성화시키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전했다. 서울 사대문 안의 보행여건은 나름대로 개선됐지만 부도심의 보행환경은 여전히 낙후돼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부도심에 광장을 만들고 보행환경을 개선하면 지역이 활성화된다는 실제적인 교훈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아쉬울 때가 많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서울은 걷기 좋은 도시로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자동차만 다니던 광화문에 광장을 만든 것은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박수를 칠 만하다고 했다. 대중교통만 다니는 공간으로 만들면 현재보다 광장 이용이 더 활발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 도심의 보행환경은 높은 점수를 받기에 충분하지만 주거지 보행여건은 열악하다”며 “자동차와 보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이면도로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거주자 우선주차제도는 구급차와 소방차의 진입을 막고 있으며 주민의 안전한 보행을 위협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의 차고지증명제는 차고가 없으면 차를 구입하지 못하는 제도”라며 “내 물건을 공공이 관리하는 도로에 세워 놓는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했다. 그는 자율주행차가 나오거나 자동차 공유제가 활성화되면 주거지 보행환경이 나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필요할 때 주문해서 차를 이용한다면 굳이 좁은 집 앞 도로에 주차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미군으로부터 반환받는 용산공원도 도심의 보행환경을 크게 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어 접근성이 좋은 데다 평탄해 시민들이 걸으면서 사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용산공원을 한강공원과 연결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명품 보행 공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동작대교 주변에 일부 녹지공간이 남아 있어 이를 잇는다면 한강과 용산공원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공간이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세계 많은 나라의 도시 중심지에는 차 없는 거리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독일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도심지의 중요 가로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중심거리인 스트뢰에는 보행전용공간으로 운영되면서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사람들이 밀려드는 공간으로 변했다. 이 거리는 코펜하겐 시청광장에서 콩겐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1.2㎞의 상점가로 유럽에서 가장 긴 자동차 없는 거리이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주변 도로가 보행공간으로 만들어지면서 시민과 관광객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스마트폰의 구글맵 등에 의지해 여행을 다니는 자유여행시대에는 보행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외국 관광객 유치에 큰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걸어다닐 수 있는 사대문 안은 중요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안전한 보행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서울 도심을 대중교통 중심으로 개편하고 도심진입통행료를 신설해 도심진입차량에 대해서는 요금을 부과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사동길에 친근감을 느껴 수시로 찾았다. 도시연대를 맡기 전에는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사모)’을 만들었을 정도로 애착을 느꼈다. 요즘은 북촌 감고당길과 화개길을 주로 찾는다.
600년 전 만들어진 한양도성 안은 걷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재개발을 통해서 격자로 만들어져 보행에 불편을 겪고 있지만 그래도 보행도시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역사적인 건물 몇개를 보존하면 역사도심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옛길을 보존하는 것”이라며 “북악산 낙산 인왕산 남산 능선 위로 흘러가는 한양도성은 지형과 사람이 만든 하나의 완성품”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은 지형이 중요한 도시라고 했다. 시가지에서 능선 봉우리를 보는 경관이 아주 훌륭한 도시가 서울의 역사도심이라고 했다. 광화문 광장에서 북쪽 방향을 보면 광화문 근정전 지붕과 청와대 지붕, 백악 봉우리, 북한산 줄기인 보현봉 봉우리가 차례로 보인다. 이 경관은 한양도성을 처음 만들 때부터 현재까지 내려온 역사적 경관이어서 세계 어디에 내놔도 처지지 않는다고 했다. 후손들이 보호하고 가꿔야 할 경관이라고 했다. 한양도성이 갖고 있는 보행도시로서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경관적, 즉 걸으면서 산 능선을 볼 수 있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순성길은 도심경관을 제대로 볼 수 있어 꼭 한번 찾아보라고 권유했다. 역사도심 내 건물이 높아지면 시내 조망이 훼손돼 서울시가 역사도심 내 건물 높이를 90m로 제한한 것도 도심경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김 교수는 도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고 했다. 걸으면서 발로 느끼고 몸으로 체화해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도시디자인의 질은 보행자가 어떻게 느낄 수 있는 것인가에 결정된다고 했다. 도시공간의 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걷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10년째 도시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걷기 좋은 도시는 시민들이 ‘우리 동네 보행을 개선해 달라’고 행정기관에 요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일상적인 공간의 품질을 개선해 달라고 나설 때부터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도시연대는 이런 시민들의 생각을 돕고 나누는 역할을 한다.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

△1952년 경기 양평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 △독일 아헨공대 건축대학 공학박사 △공간건축연구소 △독일 HP&P건축설계사무소 △서울시립대 기획처장 △국토해양부 보금자리주택 통합심의위원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서울시 도시재정비위원회 위원 △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서울시 명예시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