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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장병들이 행진을 실시하고 있다. 미 국방부 제공 |
장교나 부사관 등 직업군인들은 소속 부대에서 공식 행사가 열리면 전투복 대신 제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에 바탕을 둔 군복을 입어 적군의 기를 꺾는 방식의 전쟁은 20세기 들어 사라졌다. 땅바닥에 구르고 기어가며 적군이 쏘는 총탄을 피해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현대 전장에서 양복점에서 맞춘 제복은 실용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형을 갖춰 움직이는 것 역시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의 군부대에서는 장병들이 제식훈련을 하며 대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고, 군 간부들은 몸에 꼭 맞는 제복을 입은 채 각종 행사에 참석해 ‘각’을 잡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근원적인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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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계룡대에서 열린 합동임관식에 참가한 여군 의장대. 국방부 제공 |
◆ 전투력 강화의 유산이었던 제식훈련과 제복
인류가 중국, 이집트 등에서 문명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세우면서 그 힘을 과시하고 영토를 넓히는데 동원된 것은 군대였다. 강력한 군대를 동원해 주변 국가들을 점령한 고대 국가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 대포 등과 같은 최신무기가 없던 시절, 군대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병사들을 조직화해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300’을 떠올려보자.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한 스파르타군은 서로의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밀집한 형태의 대형을 유지한 채 페르시아군을 공격을 저지하며 창으로 반격을 한다. ‘팰렁크스’라 불리는 이 대형은 그리스 세계를 지중해의 중심으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스의 팰렁크스 대형을 깨고 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기병과 보병의 유연한 움직임을 강조했지만 밀집대형은 여전히 유지됐다. 그리스와 로마군에서 밀집대형은 전투력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전투 도중에도 밀집대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강도 높은 제식훈련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제식훈련은 기사가 전장의 주역이었던 중세 시대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총기와 화약의 발명으로 15세기부터 전장 환경이 급변하면서 제식훈련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이때 당시 소총은 기존의 활이나 석궁보다 훈련에 소요되는 시간이 짧아 전장에서 빠르게 보급됐다. 하지만 유효사거리가 100m에도 미치지 못했고, 분당 1발 꼴로 발사속도도 낮았다. 때문에 병사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적진을 향해 전진하다 일제히 사격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했다. 적군의 포격으로 바로 옆의 병사가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고 전진해 사격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병사들이 한 사람처럼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제식훈련은 이를 위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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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안중근 의사 추모행사에 참석해 안 의사를 추모하고 있다. 육군 제공 |
이러한 전술은 18세기 나폴레옹이 포병을 이용한 전술을 중시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후 19세기 소총과 대포 기술의 발달로 발사속도와 정확성이 높아지면서 중요성이 약해졌다. 제식훈련의 전술적 효용성에 결정타를 안긴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개전 당시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전투에 나선 젊은 병사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적진으로 전진했다. 이들을 향해 맥심 기관총이 불을 뿜자 총탄을 피할 곳이 없던 병사들은 수숫단처럼 쓰러졌다. 이런 식으로 대규모 전투에서 수십만명이 사망하자 은폐와 각개전투 위주의 전술훈련이 각광받았고 제식훈련은 군대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 성격이 바뀐다.
장병들이 입는 제복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부터 제복은 일반인들과 군인을 구분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군대 조직을 나타내는 중요한 식별도구였다. 전투가 시작되면 군대는 각 부대별로 동서남북 사방 수㎞ 길이로 널리 퍼져 움직인다. 망원경이 없던 시절 지휘관은 높은 곳에 올라 아군의 움직임을 살피며 전세를 분석하고 전령을 통해 명령을 전달했다. 멀리서도 예하 부대의 움직임을 빨리 포착하기 위해서는 눈에 띠는 색상의 군복을 착용하고 군기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전국 시대 일본군 병사들이 등에 각양각색의 깃발을 꽂고 다닌 것도 이같은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군사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약해졌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투에 쓰이는 군복과 공식 행사에서 착용하는 제복으로 구분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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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 62기 졸업식에서 분열을 실시하고 있다. 공군 제공 |
◆ 군의 기강 유지와 사회화 도구로 바뀌어
제식훈련과 제복이 현대전에서 전술적으로 큰 의미가 없어진 지금에도 군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군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은 20여년을 자유롭게 살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성격도 행동도 각양각색인 젊은이들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군인으로 키워내려면 군인으로서의 의식을 주입해야 한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의 어깨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기를 바랍니다”와 같은 연설은 통하지 않는다. 자장가인지 설교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루한 연설을 반복하는 것보다는 신병들에게 군복을 입힌 뒤 연병장에서 조교가 외치는 “왼발! 왼발!” 구령에 맞춰 몇 시간씩 제식훈련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제식훈련을 통해 대형을 갖추는 방법을 배운 병사들은 신병교육기간 동안 연병장에서 훈련할 때도, 밥 먹으러 식당으로 이동할 때도, 일요일에 종교활동을 하러 갈 때도 제식훈련에서 배운 것처럼 대형을 갖춰 움직인다.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면서 ‘아, 내가 정말로 군인이 됐구나’하는 인식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군에서의 사회화 효과다.
자신이 군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제식훈련은 군인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기강을 확립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군인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도록 만들어진 군용 장비를 사용한다. 올바르게 사용하면 전장에서 전우의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면 전우의 생명을 빼앗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장비 사용과정에서 고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지휘관이 비합리적인 명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적군에 의해 포위되기 직전인데도 지휘관은 본대의 후퇴를 위해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성적으로 볼 때는 후퇴해야 목숨을 건지지만 군인의 시각으로는 진지를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개인적인 생존본능을 억누르고 임무를 수행하려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태도를 평상시부터 습관화해야 하며, 이는 엄정한 군 기강이 존재할 때 유지된다. 제식훈련은 군 기강을 유지하는 밑거름을 제공한다. 조교들이 상관에게 경례하는 방법이나 예의를 갖추는 방식 등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병사들은 지휘관의 권위와 명령에 자연스레 복종하게 된다. 지휘관은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한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강을 확립하고 부대의 일체화를 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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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동명부대 17진 환송식에 참석한 동명부대원들이 전방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육군 제공 |
제복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개방된 사회라 할지라도 군복을 입은 군인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공식행사에서 착용하는 제복을 입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군인들은 제복을 입었을 때는 일반인들이 함께 하는 행사이거나 군 통수권자가 참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행사에서 제복을 입은 군인은 군을 대표하는 존재로 비춰진다. 따라서 제복을 입은 군인은 개인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군인의 자세에 걸맞는 엄격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사관생도나 학사장교후보생들이 교육 기간 동안 제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군인의 자세와 기강을 내재화하기 위한 교육적 차원이다.
다양한 교육 방법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몸으로 배우는 교육’이다. 아이돌 그룹들이 칼군무를 할 수 있는 것도 음악이 나오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댄스 연습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제식훈련과 제복은 장병들을 군의 일원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몸으로 배우는 교육’이다. 물리적인 경험을 통해 체득한 교육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교육효과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을 자다 군에 재입대해 제식훈련을 받거나 제복을 입고 행사장에서 목석처럼 서있는 꿈을 꾸고 몸서리치며 깨어나는 경험을 했다면 그 사람의 무의식 중에는 여전히 군인의 의식이 남아있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 수백만의 예비군을 운영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식훈련과 제복 착용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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