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라쇼몽 효과’라고 한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가 1950년 찍은 영화 ‘라쇼몽’에서 유래한 용어다. 숲 속에서 산적을 만나 칼에 찔려 죽은 사무라이. 사무라이 남편과 함께 있다 겁탈당한 아내. 영화는 사건 관련자 진술이 제각기 다른 이유를 다룬다. 아내는 자신을 경멸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산적은 결투 끝에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말한다. 영매사 몸에 빙의한 사무라이는 치욕감에 자살했다고 한다. 이런 차이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정부가 2007년 11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물어봤다는 ‘송민순 회고록’을 놓고 진실 공방이 뜨겁다.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라쇼몽 효과를 들어 문재인 전 대표를 엄호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결의안을 끝까지 관철해보려는 입장을 회고록에 담은 것 같다”는 것이다. 문 전 대표가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 입장을 확인하도록 했다는 대목은 ‘팩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5인의 기억은 라쇼몽처럼 제각각이다. 송 전 장관 외 다른 이들도 제 입장을 담은 셈이다.
핵심 당사자인 문 전 대표는 “기억이 잘 안 난다”며 아예 언급을 꺼렸다. 어제도 “기억이 좋은 분들에게 들으세요”라고 했다. 그는 4·13 총선 때 호남 참패 시 정계은퇴를 약속했다. “부산 5석 주면 신공항을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요즘 대권 행보를 보면 이를 까맣게 잊은 듯하다. 몇 달 전 것도 이런데, ‘9년 전 기억’은 오죽하겠는가. ‘기억 안 난다’는 문 전 대표 말은 믿고 싶다.
허범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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