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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25) 문자권력 나눔을 위한 세종대왕의 비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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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10-07 20:27:46 수정 : 2016-10-07 20: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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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명예·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합법적 방편이자 지름길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이기고,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 앞말은 노자(老子)의 말이고, 뒷말은 중학교 시절 영어 시간에 배운 말이다. 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명예와 이익을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편이자 절대 권력을 차지하는 지름길이었다. 때로는 권력을 잡은 자가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서까지 문자를 무기로 글 모르는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이민족까지 지배하기도 하였다. 문자는 왕조 창업을 합리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으니, 글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를 ‘문자권력(文字權力)’이라 이름 붙여본다.


‘글’ 또는 ‘문자(文字)’라는 말은 때로 ‘학문’ 또는 ‘학식’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하는데,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이 그러면 쓰겠나?’라고 할 때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공자 앞에 문자 쓰네’라고 할 때의 ‘문자’는 어려운 문구를 많이 쓰며 유식한 채 하는 사람을 비아냥거리며 하는 말이다.

그나저나 역사시대 이래 지금까지 문자를 익히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권력의 구심점에 있었다. 문자를 터득하고 붓을 잡는다는 것은 곧 권력을 잡는 일이었다. 문자 속에는 무지갯빛 부귀영화가 약속되어 있으므로, 서예 용구를 일러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송나라 진종황제는 그가 쓴 ‘권학문(勸學文)’에서 문자권력의 내막을 온전히 실토하고 있다.

집안을 부유케 하려고 좋은 밭을 사지 말라
글 속에 저절로 천종의 봉록이 들어있느니라.
편안히 살려고 높은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글 속에 절로 황금으로 지어진 집이 숨어있단다.
문을 나섬에 따르는 자가 없다고 아쉬워 말라
글 속에는 수레와 말들이 무더기로 넘쳐난다.
장가감에 좋은 중매가 없다고 아쉬워하지 말라
글 속에 얼굴이 옥처럼 어여쁜 여자가 있느니라.
사나이로서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육경(六經)을 부지런히 창 앞에서 읽을지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글을 익혀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만 하면, 돈과 명예는 물론 예쁜 아내까지도 한꺼번에 굴러들어온다는 글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글공부지만 예전에는 소수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열려있던 글 길이었다.

문자는 발명 이래 양반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으로서, 요즈음처럼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소수의 집권자가 권력 유지 수단으로 문자를 악용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문자를 안다는 것만으로 그들은 그들의 법(法)을 만들고 또 법이라는 명목 아래, 글 모르는 사람들을 마구 부려먹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머리라면 글을 모르는 사람은 손발이었다. 너스레를 떤다면 ‘문맹자(文盲者)는 문명자(文明者)의 수족(手足)’ 역할을 해야만 빌붙어 살 수 있었다는 말씀이다. 문자를 모르면 상놈, 제 이름도 못 쓰면 쌍놈이었다. 이런 사람은 세종대왕으로부터도 ‘어리석은 백성(愚民)’이란 소리를 듣는다. 그러고 보니 욕 중에 상욕은 ‘무식한 놈’이렷다.

훈민정음.
돌이켜 보면 갑골문은 제사와 수렵을 맡은 부족장이나 제왕의 문자권력이었다. 백성들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고, 또 알아서도 안 되는 금기의 글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름 그대로의 순수한 우민정책(愚民政策)이라 할 수 있겠다. 퇴폐 문화를 눈감아주고 도박을 통한 사행심을 조장하여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오늘날의 우민정책과는 다르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승상인 이사(李斯)를 시켜 새로운 글자 소전(小篆)을 만들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며 권력을 휘둘렀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정복하고 나서 파스파라는 티베트 승려를 시켜 이른바 ‘파스파문자’라는 몽골문자를 만들어 지배하였으며,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몽골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문자권력을 펼쳤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는 문자권력 옹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문자권력을 나눠주기 위한 창의적 발상이었다. 따라서 문자권력의 누수를 염려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당연한 처사로 여겨진다. 물론 중국의 눈치 보기도 다분히 개재(介在)했을 것이다.

이때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기지가 발현된다. 세종은 이러한 현실을 미리 간파하고 창제 작업을 ‘비밀리 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중차대한 사건을 필자는 ‘문자권력 나눔을 위한 세종대왕의 비밀 프로젝트’라 이름 붙여 본다.

만약 새로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 공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쳤더라면, 시작하기도 전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힐 게 분명했을 것이다. 세종이 이 프로젝트를 자랑스럽게 대놓고 추진했더라면 많은 대신이 일어나 중국의 힘까지 빌려 가며 세종을 압박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자권력의 기득권자 처지에서 보면, 그때까지의 과거(科擧) 시험은 줄곧 한문(漢文)으로 치러 왔고, 그 이후로도 한글 아닌 한문으로 과거가 치러질 것이 분명하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종과 최만리 사이에 양해각서(諒解覺書)가 암암리 오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리를 뽑을 때 실시했던 과거 시험을 중국에서는 수나라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9년(958)에 처음 시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만약 원 세조가 ‘파스파문자’로, 청 태조가 ‘만주문자’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과거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면 각 문자의 위상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중국의 지성이자 <아큐정전(阿Q正傳)>의 저자 루쉰(魯迅, 1881~1936)이 ‘어려운 한자가 없어지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漢字不亡 中國必亡)’라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루쉰의 고민을 받아들여 어려운 한자 대신에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한글을 사용하자고 주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세종대왕은 백성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창제한다고 했다. 세종대왕의 가장 훌륭한 업적은 그들만의 문자권력을 어떻게 해서든 백성에서 나누어 주어서, 어리석은 백성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백성이 있으므로 나라가 존재하며, 나라가 있으므로 군주가 존재한다.’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바탕으로 백성 사랑을 실천한 군주였다. 그 애민사업의 대표적 업적이 천고에 길이 빛날 훈민정음 창제였다. 세종대왕의 일관된 신념은 문자권력을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일이었고, 백성의 지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민치(民治)도 잘된다고 믿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구 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권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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