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 축구가 32년이라는 길고도 긴 침묵을 깨고 월드컵 무대를 다시 밟은 지 30년이 된다. ‘아시아의 호랑이’라 불리는 한국 축구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이후 온갖 역경을 딛고 1986 멕시코월드컵에 진출하게 되자 온 국민은 감격과 흥분 속에 빠져들었다. 국민은 열정과 엄청난 헌신을 보여준 대표 선수들을 TV로 지켜보느라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선수들의 지칠 줄 모르는 투혼에 국민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 한국 축구가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도록 물꼬를 튼 게 바로 멕시코월드컵이었고,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창조에 밀알이 된 셈이다. 인구 50억명이 넘는 아시아에서는 2개국만 출전했던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김정남 한국 OB축구회장은 축구 인생 60년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김 회장은 그동안 수많은 직책을 맡았지만 감독이라는 호칭이 가장 듣기 좋고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호칭에서조차 그라운드에 영원히 서고 싶은 노병의 바람이 그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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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축구 감독’ 김정남씨가 최근 서울 효장구장 내 한국OB축구회 복지관에 걸려 있는 기념사진 앞에서 1956년 제1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배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앞줄 왼쪽 다섯번째)은 우승하고 개선한 선수단을 경무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남정탁 기자 |
전 대회(1982년 스페인월드컵) 우승팀인 이탈리아,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가 전성기였던 아르헨티나, 동구의 강호 불가리아와 함께 죽음의 A조에 속한 한국 축구 대표팀은 30년 전 이맘 때 멕시코의 무더위 속에서 열정과 투혼을 떨쳐냈다. 대회 우승팀인 아르헨티나에 1-3, 이탈리아에 2-3으로 패한 뒤 불가리아와 1-1로 비기면서 한국 월드컵 축구 사상 첫 승점을 따낸 김정남호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개선장군 같은 환호를 받았다. 김 감독은 “비록 실력은 모자랐지만 세계의 높은 벽을 향해 마음껏 투혼을 불살랐다. 국민이 이를 높이 평가해준 덕분”이라고 말한다.
김 감독은 당시 23명의 제자 가운데 골키퍼 오연교와 수비수 정용환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된 게 마음이 무척 아프다고 했다. 당시 멤버는 차범근 2017 20세 이하(U-20) 월드컵조직위원회 부위원장(전 1998프랑스월드컵 감독), 허정무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전 2010 남아공 월드컵 감독), 조영증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 최순호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김종부 프로축구 챌린지 경남FC감독, 김주성 전 축구협회 사무총장 등으로 현재 한국 축구를 이끌고 있는 지도층 인사들이다. “상대 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세계적인 수준의 팀과 평가전을 해본 적도 없었다. 나름 훈련을 많이 했지만 막상 결전의 땅 멕시코에 도착하니 선수들이 지레 겁을 먹고 잔뜩 위축되더군. 우리는 잃을 게 없으니 질 때 지더라도 멋지게 지자고 했지.”
당시 대표팀에는 체력 코치나 골키퍼 코치, 트레이너 등 지원 스태프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감독과 코치 한 명이 전부였고,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공에 직접 바람을 넣어 찼을 정도로 축구환경이 열악했다. 축구협회 예산 자체가 없었다.
김 감독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일본을 꺾고 월드컵 출전을 확정하자 본부석으로 올라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만세삼창을 했다. 외부 지원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도 월드컵에 나간다는 국민적 자부심이 대단했다”며 그날의 감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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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OB축구회장보다도 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좋다는 김정남씨가 최근 한국 축구의 메카인 효창구장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서울 출생의 김 감독은 서울 은로초등학교 6학년 때 흑석동 골목길에서 축구공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낸 외삼촌의 지도 덕분에 남들보다 축구를 잘했던 김 감독은 보성중학교에 진학한 뒤 축구 선수출신인 체육교사 고계성씨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축구를 했다. 어머니는 5남3녀 중 장남인 김 감독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요구했지만 축구가 너무 재미있어 속여가며 공을 찼다. 김 감독의 당시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김 감독이 진학한 보성고는 축구 수준이 낮아 2부에 속했다. 이왕이면 큰 물에서 제대로 놀아야겠다며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전학했지만 잘하는 선수한테 밀려 비집고 들어갈 포지션이 마땅치 않았다. 공격수를 선호했던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합을 뛰기 위해 포지션을 수비수로 바꾼 게 결국 ‘신의 한 수’가 됐다. 김 감독은 “끝까지 미드필더를 고집했더라면 축구 감독 자리는커녕 태극마크를 달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축구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고 3때이던 1962년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돼 메르데카배 국제축구대회에 출전한 김 감독은 고려대에 진학해서야 다시 미드필더 포지션을 되찾았다. 당시 고등학생으로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은 센세이셔널했다. 하지만 대표팀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풀백을 맡았고, 한 살 어린 친구이자 동료인 경남 통영 출신의 김호 1994 미국월드컵 대표팀 감독과 콤비를 이뤄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 축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둘은 한때 K리그 감독으로서 경쟁했지만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
잘못해서 결과가 나쁘면 자책도 하고 반성을 통해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이듬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컵 대회에서 우승컵을 안고 개선했을 때엔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선수들에게는 큰 위로가 됐고 자신감도 생겼다.
김 감독은 “즐거움과 희망을 준 게 축구였지만 늘 좋을 수는 없다. 크고 작은 수난도 많았다. 팀 성적에 따라 좌절과 분발을 통해 쾌감을 맛보는 게 축구 인생이었다”고 강조한다. 1971년 9월 당시 서울운동장(지금은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의 옛 이름)에서 열린 말레이시아와의 뮌헨올림픽 최종 예선전에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수중전 끝에 0-1로 분패해 올림픽 티켓을 놓친 것 또한 뼈아프다고 했다. 축구 팬들은 안방에서의 분패에 몹시 분노해했지만 말레이시아는 오래전부터 유럽과 교류하면서 실력을 쌓아왔던 게 사실이다.
그 옛날 A매치 평가전이 거의 없던 시절 A매치 52경기에 출전한 김 감독은 1971년 11월 현역에서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1975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된 김 감독은 최정민 감독 체제 아래에서 동생인 강남(61·전 중경고 감독)과 성남(전 홍익대 감독) 쌍둥이형제를 선수로 가르쳤다. 김 감독은 동생들도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대했다. 막내 동생인 형남(60·프로축구연맹 경기감독관)도 축구선수로 활약해 축구가족으로도 유명하다. 명절 때 형제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는 늘 축구다. 김 감독은 바로 밑에 동생은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축구를 하지 않았다고 웃는다.
선수시절 1970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때 주장으로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김 감독은 1978 방콕아시안게임 때에는 코치로서,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에는 감독으로 우승을 맛보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프로축구 K리그에서도 유공코끼리축구단(현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6년반, 울산 현대에서 8년간의 지휘봉을 잡으며 210승을 쌓았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감독 최다승 기록이다. 더구나 제주는 김 감독 재임시절이던 1989년 이후, 울산은 2005년 이후 아직 정상을 밟지 못하고 있다.
천성이 얌전하고 선비 스타일인 김 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과는 거리가 멀다. 한 팀에서 오랫동안 사령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누구보다 지기 싫어하고 승부욕이 강하지만 선수들에게는 채찍보다 당근을 택했다. 선수들의 화합과 팀 분위기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는데 선수들이 잘 따라주어 고마울 뿐”이라고 말한다.
정몽준 축구협회장 시절이던 김 감독은 1995년 협회 전무이사로 취임한다. 5년 동안 협회 살림살이와 행정을 총책임졌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것 외에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고 했다. 월드컵 유치를 위해 한국보다 몇년 전부터 공을 들인 일본과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공동으로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 성공했다. 정 회장을 도왔을 뿐 크게 한 것이 없다고 몸을 낮춘 김 감독은 “월드컵 유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을 때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결국 대업을 이룬 뒤 성공적 개최를 했고, 후배들이 세계 4강에 올라 선배 축구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거쳐 3년째 OB축구회장을 맡고 있는 김 감독은 요즘 서울 용산구 후암동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한국축구의 메카인 효창구장으로 매일 출근한다. 원로 축구인들이 축구를 볼 수 있고,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복지관이 마련돼 있다. 원로들 점심값은 다행히 축구협회가 지원해 준다. 인천에서 오시는 김명기 원로 등 매일 10여명 정도가 나오는데 김 감독은 아직 중참밖에 되지 않는다. 선배들의 눈치를 보고 원로들을 모시느라 정신이 없다. 지난해까지는 각종 축구모임에 4개나 가입해 열심히 공을 찼다. 왼쪽 무릎이 성치 않고 척추협착증세로 축구를 포기했다. 틈나는 대로 효창공원에서 거꾸로 매달리기를 하고 하루에 6000보를 걸으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 올림픽, 아시안게임, 내년에 열리는 20세이하 월드컵 개최 등 그랜드 슬램을 이뤘다. 유치한 대회는 모두 성공적으로 해냈다. 죽을 때까지 축구를 놓을 수는 없고, 영원히 축구하고 살고 싶다는 노병 김 감독에게 소원이 딱 하나 있다. 생전에 한국 축구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에 드는 걸 꼭 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 축구 세계 10위라는 말에 김 감독의 얼굴에는 어느새 힘과 웃음이 넘쳐났다.
박병헌 선임기자 bonanza7@segye.com
△1942년 서울 출생, 5남3녀 중 장남 △서울 보성중-한양공고-고려대 △1962년 태극마크 달고 메르데카컵 대회 출전, 도쿄올림픽(64년), 아시안게임 우승(70년) △해병대, 실업팀 외환은행 선수 △프로축구 유공 감독(1985∼91년), 1986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 감독, 서울 아시안게임 및 88 서울올림픽 대표팀 감독(1985∼88년) △대한축구협회 전무(1994∼98년) △중국 프로축구 슈퍼리그 산둥 루넝 및 칭다오 중넝 감독(1998∼99년) △프로축구 울산 현대 감독(2000∼2008년)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2010∼2013년) △한국 OB축구회장(20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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