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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 절친 3인의 단합대회, 단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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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7-06 21:33:54 수정 : 2016-07-06 21: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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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천한 기예로 여긴 조선시대에 직업화가들은 예술적 성과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단원도’(檀園圖·사진)를 그린 김홍도는 예외였다. 예단의 총수 강세황을 사사하였고 정조 임금의 후원을 받았던 그는 지금도 풍속화의 대가로 친숙하다.

김홍도의 삶이 언제나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화공으로서 세상의 편견을 감내해야 했고,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그래도 곁에는 두 친구가 있었으니, 정란과 강희언이다.

‘단원도’의 무대는 김홍도의 집이다. 화면 윗부분의 글에 의하면 김홍도의 나이 37세 때인 1781년 12월(음력), 입춘이 지나고 세 사람이 사랑방 마루에 모였다. 그들은 이 자리를 ‘진실되고 법식에 거리낌 없는 모임’이라는 의미로 ‘진솔회’(眞率會)라 이름을 짓고 소박한 잔치를 열었다.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고, 강희언은 무릎을 세운 채 부채질을 하며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다. 옆에 앉아 장단에 맞춰 시를 읊고 있는 이가 정란이다. 강희언은 중인가문 출신으로, 하늘의 기운을 관찰하여 운세를 점치던 관상감(觀象監) 소속 관리였다.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정란은 시인이자 여행가이다. 부산 동래 출신인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버리고 조선 천지를 넘나들며 시인묵객들과 어울렸다.

김홍도가 ‘단원도’를 실제 그린 때는 모임을 열고 3년이 지난 1784년이다. 3년 후 세 사람의 삶은 많이 변해 있었다. 김홍도는 안동의 찰방(察訪)으로 부임했지만 생활이 몹시 궁핍했다고 하며, 강희언은 그 사이 세상을 떠났다. 정란은 세상풍파에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다. 김홍도는 그림을 통해 현실은 힘들었지만 각자 분야에서 한 시기를 풍미한 그들만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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