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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항일학생시위 주도… 의열단 투사… 불꽃 같은 삶 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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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6-09 22:08:42 수정 : 2016-06-15 17: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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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의사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항일독립운동가입니다.”

지난달 27일 오전 10시 부산 금정구 만남의 광장에서는 ‘박차정 의사 순국 7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유족과 기관장 및 동래여중, 동래여고 학생, 동래학원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박차정은 1910년 5월 8일 부산 동래구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되던 1918년 1월 아버지 박용한은 일제의 무단 통치에 비분강개해 유서 한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1925년 4월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할 무렵 동래 지역은 항일의 기세가 전국의 어느 지방 못지않게 충만해 있었다. 박차정은 동래일신여학교의 동맹 휴교를 주동하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항일 의식과 투쟁 정신은 오빠인 박문희, 박문호의 영향이 컸다.

그가 여성 운동과 민족 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29년 7월 근우회 동래지회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면서부터. 그는 선전 조직과 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0년대 독립운동노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작은 사진)이 세운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935년에 3기생들이 훈련받던 장소인 ‘천녕사’에는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흔적이 남아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이때 근우회는 1929년 광주 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권유에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박차정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에 합류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중앙부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의열단에서 만난 김원봉과 결혼했고, 이듬해 근거지를 장쑤성 난징시로 옮겼다. 1932년 10월 20일 김원봉과 함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과 훈련을 담당했다. 이때부터 박차정은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1935년 7월 난징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기관지인 ‘우리들의 생활’, ‘민족 혁명’, ‘반도’ 등의 발행에 관여했다. 이 무렵 한커우에 머무르면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또 창사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돼 대(對)일본 라디오 방송을 담당했다. 1938년 10월 10일 한국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활동했다. 1939년 2월 장시성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때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27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 김원봉과 함께 만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조선혁명 간부학교, 조선혁명 간부훈련반, 의열단 간부학교로도 불림)는 장쑤성 난징시 외곽에 있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제1기에서 제3기까지 125명의 청년 투사를 양성했다. 지금은 3기가 훈련 받던 천녕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아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정문 주춧돌과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옛날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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