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식품 단속을 전담하는 서울지검 특수2부가 굴지의 라면 제조사 임직원 10명을 구속하는 등 순조롭게 굴러가던 수사는 별안간 벽에 부딪혔다. 식품업계가 “해당 공업용 우지는 인체에 해롭지 않다”며 대대적 홍보전에 나선 것이다. 주무부처인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도 “연구 결과 유해성이 입증된 것은 없다”며 업계를 거드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검찰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벌였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자 격앙된 수사팀 검사들은 “보사부도 수사해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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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사회부 차장 |
“검사들은 수사를 완벽하게 진행했음에도 여론의 역풍이 부는 것에 몹시 억울해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 약간 흥분한 나의 발언이 끝나자 강 총리는 ‘검찰이 수사를 잘못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 사안은 자칫 정권의 존립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며 진화에 나섰다. 그는 ‘후배 검사들이 동요하면 검사장이 잘 좀 다독이라’는 당부도 했다. 일개 검사장에 대한 총리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그분은 ‘신사’였다.”
그날 김 지검장이 강 총리의 인품에 반한 것과 달리 회의 결론은 검찰에 유리하지 않았다. ‘라면 제조 과정은 위법이나, 그렇게 만들어진 라면 완제품은 인체에 무해하다.’ 앞뒤가 안 맞는 발표문이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됐다.
법원도 검찰을 외면했다. 8년 가까운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은 1997년 8월 우지 라면 사건 피고인 전원의 무죄를 확정했다. 재판부는 ‘공업용 우지는 아무리 정제해도 식용이 될 수 없다’는 검찰의 주장 대신 ‘비식용 우지도 정제만 거치면 식용으로 쓸 수 있다’는 식품업계의 반박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많은 검찰 구성원에게 여전히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 지검장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비유해 “큰 물고기를 낚았지만 상어떼에 살점을 모두 뜯겨 뼈만 앙상한 채 항구로 돌아온 꼴”이라고 탄식했다.
물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우지 라면 사건과 크게 다르다. 우지 라면은 국민적 공분이 일긴 했어도 딱히 ‘피해자’로 불릴 만한 이는 없었다. 반면 가습기 살균제는 현재까지 알려진 사망자만 146명이 나왔다. 제조사인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의 구속수감 등 지금까지의 수사 성과는 검찰이 일군 게 아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이 흘린 피와 눈물, 땀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기업의 횡포에 분노하는 일반 시민까지 가세해 눈을 부릅뜨며 검찰 수사를 주시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 대응의 주무부처를 환경부에서 국무총리실로 격상했다. 수사가 제법 진척되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외에 피해자 보상과 재발 방지책 마련도 중요해졌다. 관계부처들을 독려해 제대로 된 후속 대책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황교안 총리의 어깨에 지워졌다.
황 총리는 검사 출신의 법률가다. 모름지기 법조인은 맺고 끊음이 확실해야 한다. 27년 전에 강 총리가 보여준 ‘검찰도 옳고 보사부도 옳다’는 식의 어정쩡한 태도는 곤란하다. 기업이나 연구기관은 물론 정부의 잘잘못도 가려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피해를 키운 공무원이 있다면 일벌백계로 엄하게 다스림이 마땅하다. 황 총리가 언제까지 재직할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사안만큼은 똑부러지게 마무리짓고 물러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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