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21일 새벽 김좌진·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의해 실시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22일 천수평전투와 이랑촌전투, 23일 맹개골전투와 만기구전투, 홍범도 부대가 치른 완루구 전투, 25일부터 이틀간의 고동하곡전투 등 청산리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독립군은 일본군에게 쫓기는 불리한 처지에서도 매복과 기습, 습격 등의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대승리를 거뒀다. 독립전쟁사에는 이 전투에서 3000여명의 독립군이 1만5000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청산리전투의 대승리는 일본의 핍박 아래 고통 받던 조선 국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큰 기쁨과 광복에의 의지를 심어준 대승리였다. ‘청산리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을 역사는 독립항쟁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충남 홍성의 손꼽히는 부호 집안에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요즘 말로 ‘엄친아’였던 셈이다. 그는 15세에 집에서 부리던 노복 30여명의 노비 문서를 불살라 해방시키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무상 분배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가 99칸짜리 집에 ‘호명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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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베개봉에 있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에는 매년 수만명이 참배한다. 항일유적지 답사에 나선 국군간호사관학교 학생들이 기념비 주변 정화활동을 하고 있다. 국군간호사관학교 제공 |
1911년 군자금 모금활동으로 투옥돼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는 오히려 몇몇 선각자를 만났고, 더 큰 인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만주로 건너간 그는 청산리전투의 빛나는 승리로 민족에게 큰 기쁨을 안겨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맞이했다. 그는 1930년 1월 24일 박상실에게 암살당하기까지 쉼 없이 험난한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와 화룡시 정부 등은 청산리대첩 8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 8월31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베개봉 7부 능선에 웅장한 기념탑을 세웠다.
매년 한국인 등 수만명이 이곳 기념비를 찾는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이를 보면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청산리대첩을 이끈 독립투사들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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