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실 논란에 불을 지핀 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성소수자 차별법’(HB2)이다. HB2 법은 성전환자가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출생’ 성별에 따르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공화당 소속의 팻 매크로리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가 지난 3월 서명 후 지난달 발효한 HB2 법에 대해 “1964년 제정된 시민권법을 침해한다”며 소송과 주립대 지원금 수억달러 삭감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앞서 노스캐롤라이나 최대 도시인 샬럿시의 제니퍼 로버츠(민주) 시장은 교육부 지침에 따라 성전환 여성이 여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매크로리 주지사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례 제정과 인종·성차별 관련 소송을 금지하는 HB2 법안 처리를 강행했다.
7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시카고 인근 5개 고등학교 여학생과 학부모 130여명은 성전환자에게 교내 화장실과 탈의실 선택권을 부여한 지역 교육청 방침에 반발해 교육부와 법무부 등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성전환자가 여성 화장실 등을 출입하면서 여학생들의 사생활이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지역 고교의 성전환 학생은 여학생 탈의실 이용을 거부당하자 고발장을 냈다. 그러자 교육부는 해당 학교에 대한 수백만달러 규모의 지원금을 금지하고 해당 학교를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지난해 화장실 논란이 일자 “생물학적 성(性)이 아닌 성 정체성에 따라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의 ‘문화 전쟁’이 성소수자의 화장실 선택권 논란으로 번진 것이다.
미국 내에서는 최소 13개 주가 HB2와 비슷한 법을 마련 중이다. 특히 미시시피주는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LGBT)의 차별을 정당화한 종교자유법을 7월에 발효할 예정이다.
HB2에 반대하는 여론도 확산하고 있다.
링고 스타, 보스턴, 브루스 스프링스틴, 펄 잼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노스캐롤라이나 공연을 취소했고, 노스캐롤라이나 IP주소의 접근을 거부한 포르노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메리어트, 아메리칸항공, 씨티뱅크 등 미국 주요 기업 CEO 100여명은 매크로리 주지사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페이팔 등 일부 대기업은 아예 투자계획까지 철회했다. 워싱턴과 뉴욕주 등은 노스캐롤라이나 출장을 금지했고, 전미대학경기연합(NCAA)은 성소수자 차별지역에서는 대학 스포츠 경기를 열지 않기로 결정하는 등 후폭풍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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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장실 논란은 진보와 보수 진영이 수십년간 대치하다가 지난해 전체 주에서 합법화된 동성 결혼 쟁점과 닮았다.
갤럽에 따르면 동성 결혼 합법화 여론은 20년 만에 27%에서 60%로 급증했다. 공화당 지지 국민들의 동성 결혼 지지 비율도 16%에서 37%로 껑충 뛰었다. 2008년 대선 패배 후 공화당이 동성 결혼 이슈에 관대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 대선 패배 이후) 청년층 표를 얻으려면 일부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화당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며 “한 사람이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집단에서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진단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도 HB2 법에 대해 “문제가 많다. 원래대로 (트랜스젠더들이 원하는 대로 출입하도록) 놔두면 된다”는 입장이다.

성소수자 차별 문제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83%인 필리핀 하원의원 선거에 성전환자가 출마하고, 중국 상하이 주재 미국 총영사는 중국인 남성과 결혼했다는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다음달 LGBT의 최대 축제인 뉴욕 게이퍼레이드를 앞두고 성소수자 관련 이슈는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동성애는 물론 이성의 옷차림(크로스 드레싱)도 금지하는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최근 성소수자 관련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성소수자 권리운동가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추정되는 무장괴한들에 의해 살해됐고, 말레이시아 경찰청은 ‘성소수자는 자격을 갖춰도 경찰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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