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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영화이야기] 응답하라! 늘어진 비디오테이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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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2-19 14:24:00 수정 : 2015-12-19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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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기획전에 다녀왔다. “오겡끼데스까(잘 지내고 계신가요?)”란 대사로 유명한 ‘러브레터’(1995)의 그 감독이다. 기획전에선 총 12편의 작품이 상영됐는데, 지난 주말에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이 직접 내한해 관객과의 대화도 나눴다.  

개인적으로 이와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6년 어느 여름 날 미국에서였다. 극장에서 우연히 그의 영화 ‘피크닉’(1996)을 보고 짐짓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영화의 수입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감독의 영화를 본다는 자체가 일종의 사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2015년 겨울 서울 한복판에서 진행 중인 ‘이와이 슈운지 기획전’ 소식을 접하면서 떠오른 일본영화에 대한 이러 저러 생각들을 적어볼까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영화 수입이 금지된 것은 해방 이후였다. 해방 직전 몇 년간은 조선총독부의 외국영화 전면 수입금지 조치로 인해 일본영화만을 볼 수 있었으니, 급격한 상황 변화였다.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와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영화들만을 영화관뿐만 아니라 학교 등에서 봐야만 했던 시절을 지나, 일본영화는 아예 볼 수 없는 시절이 온 것이다.(대신 미군정 공보부 주도로 연간 200편이 넘게 수입된 미국영화를 볼 수 있는 시절이 온 것이기도 했다.) 

영화가 필름으로 제작되고 상영되던 시절에는 국내로 몰래 일본영화 필름을 들여와 영화를 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러다 1980년대 말부터 VCR이 각 가정에 급속하게 보급되고,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맞물리면서 소위 ‘음지’란 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몰래 일본영화 비디오를 구해 개인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친구를 통해 구한, 말로만 들었던 유명 일본영화를 비디오로 보는 것은 스릴 있는 일이였다. “나 그 영화 봤어!”라고 주변에 자랑했던 기억도 있다. 물론 1980년대 말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가 되기 이전에 연간 국내에 수입되는 외국영화 편수가 두 자리 숫자에 불과했으니, 몰래 본 자랑거리 외국영화가 일본영화만은 아니었다.

다만 ‘음지’에서 이런 영화들을 볼 때, 화질과 언어 장벽은 피할 수 없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재복사가 된 것인지 뭉개질 대로 뭉개진 영상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드는 것은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 말 영화 시장이 개방된 후에도 여전히 수입 금지 영화였던 일본영화는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국내 수입이 가능해졌다. 4차에 걸쳐 단계별 개방을 통해 2003년부터는 완전 개방에 이른다.(일본영화 뿐만 아니라 일본서적, 일본대중음악 등이 모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앞두고 꽤 격렬한 의견 충돌도 있었다. 영화 시장 개방으로 미국영화와 무한 경쟁을 하며 고전하고 있는 한국영화계가 일본영화까지 맞게 되면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특히 저질 일본영화 수입으로 인한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시장 차원과 문화적 차원에서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일본영화 개방이 시작된 1998년 한 해 동안 개봉된 한국영화는 43편이었다. 영화관을 찾은 관객 중 한국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비율은 21.35%였다. 반면 미국영화는 171편이 개봉되었고, 관객점유율은 72.3%에 이르렀다.(1999년 서울극장협회 자료 참고) 한국영화 산업의 존폐가 위태롭다고 평가되던 시기였으니, 일본영화 개방은 분명 두려울 만 했다. 일본문화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서 말이다. 

한편 당시는 구 소련영화를 포함한 동구권 영화도 수입 가능한 시기로, 일본영화 역시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한다는 찬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음성화된 일본영화 관람의 양성화가 필요하고, 우려만큼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일본영화가 개방된 지 16년이 지난 2014년 한 해 동안, 한국영화는 217편이 개봉되었고,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은 49.1%였다. 미국영화 개봉 편수는 300편이었고, 관객 점유율은 46.8%였다. 일본영화 개봉 편수는 217편으로 1998년 개방 첫해 2편에서 크게 증가했고, 관객 점유율 역시 1.2%로 1998년 0.4%에서 증가했다. 그러나 개봉 편수 대비 관객 점유율의 증가폭은 크지 않은 상황이다. 우려했던 시장 잠식이나 문화적 악영향은 대두되지 않았다.

일본영화만 상영되던 시절과 일본영화는 상영될 수 없던 시절을 지나, 한해 200편이 넘는 일본영화가 상영되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중국영화도 70여 편이 개봉되고, 유럽영화도 200여 편이 개봉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8년 대비 국내 관객 95% 이상은 변함없이 한국영화 혹은 미국영화를 보는 시절이다.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일본영화 얘기로 시작했지만, 기 승 전 ‘다양성 영화’ 얘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주로 보는 장편영화, 극영화, 그리고 주로 찾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이외의 다양성 영화관에 대한 관심에 이어, 비미국영화, 비한국영화에 대한 관심도 기대해본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가 수입되고, 상영되고 있는 지금 이 시절을 누려야하지 않겠는가. 

송영애 서일대학교 영화방송예술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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