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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세상] 신고가 필요한 순간,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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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9-20 14:48:32 수정 : 2015-09-20 14: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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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30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112나 119에 신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무척이나 복받은 삶인지도 모른다. 긴급한 큰 일 없이 평탄하게 지내왔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 최근 신고가 필요한 순간을 만났다.

자가용 차량을 운전해 퇴근하던 길이었다. 러시아워답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옆 차로에서 바로 앞으로 끼어들었다. 눈에 들어 온 것은 평소와 다른 택시 지붕 위 등이었다. 택시가 손님을 태우고 있으면 꺼져 있고, 손님을 태우고 있지 않으면 노란불이 켜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택시 등에서는 빨간 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이진경 경제부 기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뜻 얼마 전 인터넷에서 관련된 내용을 지나가듯 본 것도 같았다. 마침 신호가 걸린 틈에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봤다. 택시 지붕 등에 빨간불이 켜 있거나 빨간불이 깜박깜박 점멸하면 택시기사가 비상상황에 처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는 글이 쏟아졌다. 그리고 빨간불을 켠 택시를 보면 신고를 해야 한다는 당부도 있었다.

바로 112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그 순간에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신고를 해본 적이 없기에 침착할 수 없었고, 신고를 해 발생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아니어도 주변에 다른 택시 중 누군가 신고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 마음을 굳게 먹고 112를 눌렀다. 미처 차량 번호를 외우지도 못했는데, 전화를 건 찰나 택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한가한 좌회전 차선으로 빠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결국 112에는 현재 어디에서 신고를 하고 있고, 해당 택시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해 사라졌다는 사실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약 2시간 뒤 경찰 쪽에서는 택시를 찾지 못했고, 다른 신고도 들어온 것이 없었다는 상황을 전화로 알려줬다.

빨간 등을 켠 택시 신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만약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택시 차 번호를 확인하고 조금만 더 빨리 신고를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다.

1964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제노베스 살인사건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20대 여성 제노베스가 귀가 중 살해당했는데, 당시 살인이 발생했다는 사실보다 38명이 사건을 목격했으나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아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처음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설마 이런 일이 가능할까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내 눈 앞에 벌어진 상황을 맞닥뜨리고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싶다.

스마트폰을 들어 숫자 3개를 누르는 단순한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을까, 혹여 나섰다 피해를 입을까봐 등등 복잡한 생각으로 행동을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용기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 한 사람은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다.

이진경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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