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어머니 젖을 빠는 아이조차 돌볼 여유가 없던 백성들. 왜군이 얼마나 잔혹했으면 그랬을까. 일본으로 실어 나른 남녀노소의 코와 귀는 얼마나 될까. 십만, 백만, 이백만? 알기가 힘들다.
징비록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일까, 조선은 망했다. 1910년 한일병탄. 그 후 또 무슨 일을 벌어졌던가. 전장도 아닌 일본 한복판에서 수많은 조선인은 무참하게 숨져 갔다.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일본 관동(關東) 지방을 덮친 지진. 집이 무너지고 불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사망자 14만2000명, 실종자 3만7000명. 공포는 삽시간에 번졌다. 그런 낭패도 없었을 게다. 민란을 걱정한 걸까, 계엄령을 내리고 각 경찰서에 “조선인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를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어 퍼진 유언비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 누가 퍼뜨린 건가.
학살 유전자가 또 작동한 걸까. 이튿날부터 시작된 대학살. 도쿄,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바 등지에서 조선인은 죽창과 일본도에 찔려, 곤봉과 철봉에 맞아 스러져 갔다. 어찌 그리도 모질까. 이때 숨진 조선인은 6661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독립신문 특파원이 전한 숫자가 그렇다. 그들뿐일까. 얼마나 희생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린 아이는 널브러진 어머니에게 들러붙어 또 젖을 빨았을까. 그 아이는 살아남았을까.
힘없는 나라 백성의 원혼들, 그들을 위해 눈물 흘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알량한 학살 추모비마저 감추는 사이타마현 혼조시, 교과서에서 학살 흔적을 지우는 일본 정부. 폭력과 살인을 일본 역사의 기둥으로 삼겠다는 것인가.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슬픈 ‘진달래’는 도쿄에서 불러야 할 진혼의 노래다.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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