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게는 ‘운명적 회의’였던 셈인데 결론이 찬성인지, 반대인지는 알 수 없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국민연금법에 의거한 내부 규정에 따라 회의 결과는 바로 공개하지 않는다. 사후에 공개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후란 주주총회 이후를 말한다. 보건복지부 고위관계자는 “세부 내용은 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 이후에 공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위원회에는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을 비롯해 국민연금 내부인사 12명이 참석했다. 회의는 네 시간가량 진행됐다.

국민연금의 선택은 ‘합병 찬성’인 것으로 관측된다. 보건복지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로 공을 넘기지 않은 것부터 이를 추정케 한다. 그동안 민감한 사안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로 넘기는 게 관행이었다. 민감한 걸로 치면 이번 사안만큼 민감하고 엄중한 사안이 없다. 재벌의 경영권 승계 지원인가, 이를 위해 주주가치를 훼손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외국 투기자본의 ‘먹튀’를 도와줄 수 있는가, 투기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은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 등등 이번 사안은 ‘주주이익’ 관점에서 ‘국부유출’이란 추상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한 의제를 쏟아냈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전례 없는 민감함, 엄중함 때문에 오히려 기금운용본부 울타리 안에서 투자위가 결론을 내야 한다는 촉구와 예상이 잇따랐다. 자칫 의결권전문위가 주주이익 관점에 치중해 ‘합병 반대’ 결정을 내릴 경우 국민연금으로서도 후폭풍을 피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총대를 메라”는 주문이었다. 의결권전문위는 지난달 SK합병건에 대해서도 글로벌 의결권자문사 IS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모두 ‘합병 찬성’을 권고했는데도 “합병비율을 고려할 때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있다”며 반대를 결정했다.
여론의 무게중심도 합병 찬성 쪽으로 기우는 상황이었다. “재벌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라는 비판은 “외국 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해”라는 걱정에 밀리는 형국이었다. 주주가치 훼손 주장에도 반론이 가능하다.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심각하게 불리하다는 게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와 의결권 자문사들의 판단이지만 합병의 시너지효과에 기대를 건다면 주주가치는 오히려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다. 또 국민연금은 제일모직 지분 5.04%를 가진 대주주이기도 하다. 시가총액으로 보면 삼성물산 지분(11.21%)보다 더 크다. 제일모직의 주주가치를 생각한다면 합병에 찬성하는 게 자연스럽다. ISS도 제일모직 주주들에게는 합병 찬성을 권고했다.
국민연금이 찬성했다고 합병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합병안 가결조건은 ‘주주총회 참석주주 의결권의 3분의2 이상’과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1 이상’ 찬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현재 삼성가 13.82%, 우호지분 KCC 5.96%에 국민연금 11.21%, 여타 국내 기관 11.05%를 더해도 42.04%에 그친다. 만약 엘리엇을 제외한 외국인 26.11%, 소액주주 24.43%(일성신약 포함)가 반대 깃발 아래 똘똘 뭉친다면 합병을 장담키 어렵다. 이 때문에 삼성과 엘리엇은 주총 전까지 선거전을 방불케 하는 ‘주주 표심잡기’에 전력투구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후 전개할 주주친화 정책을 구체화했다. 양사는 이날 거버넌스위원회를 외부전문가 3인을 포함해 총 6명으로 구성하고 정기적인 주주 간담회를 통해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제일모직은 지난달 30일 긴급 IR(기업설명회)에서 통합 후 거버넌스위원회 설치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거버넌스위원회란 외국인 기관투자자를 비롯해 다양한 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두루 반영할 수 있게 돕는 기구다. 이날 엘리엇 측도 “수많은 삼성물산 주주들께서 절대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고 주장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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