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편집은 마구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제를 더욱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작업입니다. 눈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생략과 압축을 통해 (관객이) 마치 본 것처럼 머릿속에 느낌을 주는 것이죠.” 김상범(62) 편집감독은 “촬영이 종료된 시점부터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편집’이 시작되는 것이다. 130여편. 그가 지금까지 편집한 작품 수다. 미술관 옆 동물원(1988)을 시작으로 현재 상영 중인 ‘소수의견’을 비롯해 ‘무뢰한’ ‘쎄시봉’ ‘허삼관’ ‘해무’ ‘군도: 민란의 시대’ ‘변호인’ ‘은교’ ‘건축학개론’ ‘부러진 화살’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마당을 나온 암탉(애니메이션)’ ‘아저씨’ ‘라디오 스타’ ‘왕의 남자’ ‘올드보이’ ‘황산벌’ ‘YMCA야구단’ ‘집으로…’ ‘엽기적인 그녀’ ‘공동경비구역 JSA’ ‘여고괴담 2·3·5편’ 등 웬만큼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가 손질한 작품들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아버지가 편집감독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영화를 접했고, 사실 영화 이외의 다른 일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겁니다. 허허.”
그의 아버지 김희수 편집감독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감독) 등 당대 최고의 작품들을 다룬 편집의 거장이었다.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공동경비구역 JSA’ 등 자신의 흥행작을 줄줄이 가져다 김상범 감독에게 편집을 맡긴 박찬욱 감독은 그에 대해 “어릴 때부터 좋은 영화들을 모조리 보아온 터라 좋은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다”며 “누구는 대화 장면을, 누구는 마무리 장면을 잘 편집하곤 하는데, 상범이 형은 작품 전체를 와이드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박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는 제게 ‘올드보이’보다 더 의미있는 작품입니다. 1시간쯤 흘렀을 때 관객은 슬슬 견디기 힘들어하는데, 이 부분에서 아차 잘못하면 영화는 다른 곳으로 흘러가거든요. (‘…JSA’에서) 행복해 보이는 장면들로만 이어가다 보면 관객들이 남북 대치 상황이란 분위기를 잊어버리게 돼요. 그래서 이쯤에 비상이 걸리고 긴급출동하는 장면들을 배치했어요. 마지막 부분에 이영애가 제네바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그의 삶을 이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를 생략하고 오히려 비상출동 신을 돋보이게 하자고 제안했던 거예요.”
관측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불을 질러 잡목을 태우고 그 사이 열기 탓에 지뢰가 간간이 터지는 장면도 이때 넣은 것이란다.

‘편집의 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 ‘부당거래’의 오프닝이다. 원래 16분짜리를 7분으로 줄였지만,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관계도, 앞으로 전개될 내용 등을 압축해 이해하기 쉽도록 쓰윽 훑고 간다. 주인공 철기(황정민)의 승진 탈락 사연 등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그래서 철기가 뭔가를 시도할 것이란 암시와 극의 템포, 흐름까지도 단번에 전달한다.
“사실, 각 영화마다 제일 중요한 신은 이미 연출감독이 나름대로 구상해 놓은 것들입니다. 이때 편집자는 감독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신인 감독이라 할지라도 그의 구상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감독의 감각을 신뢰하거든요. 제 역할은 감독이 그리고 싶어 하는 정서를 효과적으로 집어넣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건축학개론’에서도 순서를 바꾸었다. 술취한 수지가 선배 유연석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이제훈이 몹시 괴로워한다. 다음 장면, 이제훈이 학교에서 만난 수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만, 이를 나중에 완성된 제주도 집을 둘러보고 헤어지는 장면 뒤로 끌어다 놓았다. 가난이 콤플렉스인 탓에 애인을 빼앗아가는 선배에게 대들며 주먹질 한 번 못해보고 찌질하게 끝내고만 ‘첫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첫사랑의 아련함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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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편집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상범 편집감독은 “생략과 압축을 통해 오히려 주제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는, 그래서 감독이 지닌 키워드를 관객과 맞추어 주는 작업이 편집”이라고 말한다. 남정탁 기자 |
“순서를 바꾸는 것은 단순한 한 수가 아니라, 몇년을 기다려온 감독의 열망을 고려해 작업한 결과 입니다. 이래서 영화는 편집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거죠.” 편집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가늠케 하는 말이다.
그는 시나리오를 적어도 50회 이상 정독한 뒤 편집작업에 들어간다.
“연출감독과 신뢰를 형성하려면 더 많이 시나리오를 읽어야 해요. 이야기 속에 완전히 몰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과 충분한 시간을 갖습니다. 대개 비너스 조각상처럼 황금비율로 분할하길 원하지만, 이 같은 균형을 깨트려 보는 것도 어떨까 하고 제시합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비율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그러면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올 때 하고픈 이야기가 더 많아집니다. 관객의 몫을 남겨두자는 것이죠.”

요즘 영화는 개봉 이후 몇 개월이 지나면 잊혀지고 만다. 반면, 그는 “10년쯤 지나도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작품들을 여러 편 가지고 있으니, 후회할 일은 없다”고 말한다.
“저는 가끔 감독들에게 ‘대가’가 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조로하기 때문이죠. 벌써 다 타버린 연탄재가 되지 말고, 아직은 뜨겁게 타오르길 바란다고… .”
그는 8월 개봉하는 ‘베테랑’의 막바지 작업과 새 영화 ‘사도’ ‘아가씨’를 편집하느라 여전히 철야작업 중이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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